이재용의 책무, 재판부의 책무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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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의 책무, 재판부의 책무 [기자수첩]
  • 유경표 기자
  • 승인 2023.11.2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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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부당 합병·회계 분식 의혹' 1심 공판 의의
이재용 회장, 최후진술서 '기업가 책임' 강조
"미래 인재에 일자리 제공... 초격차 지킬 것"
증거재판주의 외면 法, '여론 판결' 잇따라
'실체적 진실 발견' 위한 사법책무 잊지 말아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진=연합뉴스

“책무를 다하기 위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겠습니다. 삼성이 진정한 초일류기업으로 거듭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역량을 앞으로 나아가는데 집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오랜 기간 같이 재판받은 피고인들께도 미안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법의 엄격한 잣대로 책임 물어야 할 잘못이 있다면 제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다른 피고인들은 선처해주길 바랍니다.”

무려 3년 2개월간을 끌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한 ‘부당 합병 및 회계 분식 의혹’ 1심 공판이 내년 1월 선고를 앞두고 있다. 17일 열린 결심 공판은 이 회장의 최후진술로 마무리됐다. 이 회장이 육성으로 전한 최후진술 핵심 메시지는 ‘책임'과 '책무’였다. 

법정에 선 그의 목소리는 불안정했다.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진술을 시작한 그는 삼성이 얼마나 엄혹한 글로벌 무한경쟁의 전장에 서 있는지, 부친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 사후 얼마나 큰 심적 부담을 짊어지고 있는지 솔직한 심경을 쏟아냈다. 

이 회장은 2020년 12월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결심공판에서 ‘승어부(勝於父, 아버지를 능가함)’를 언급한 바 있다. 그러면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 삼성은 이제 달라질 것”이라며, “제가 꿈꾸는 승어부는 더 큰 의미를 담아야 한다. 회사 문화를 바꾸고 제도를 보완해 외부에서 부당한 압력이 들어와도 거부할 수 있는 촘촘한 준법제도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의 약속대로 지난 3년간 삼성은 내부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립적 감사기구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출범이 그 시작이었다. 설립 초기 일부 논란이 있었지만 준법감시위가 삼성의 경영 신뢰도를 한층 높이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다른 의견을 내는 이는 드물다.  

3년간 열린 이 사건 공판 횟수는 106회. 이 중 이 회장이 출석한 횟수는 94회이다. 해외 출장 등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공판 참석 의무를 준수했다. 매주 서울중앙지방법원을 오가면서도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부지런히 글로벌 파트너를 만나고, 해외 사업 현장을 찾아 임직원 의견을 청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의 발목을 붙든 ‘사법리스크’의 족쇄는 삼성에게 있어 피하기 어려운 타격이었다. 삼성의 대규모 M&A는 2016년 11월 미국 오디어·전장기업 하만 인수를 마지막으로 멈춘 상태다. 신사업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기 위한 삼성의 행보는 글로벌 경쟁사들과 비교할 때 분명 더디고 무겁다. 

이 회장의 이번 최후진술에서도 위기감은 잘 드러난다. 그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생성형AI 시대의 도래를 위기이자 기회로 봤다. 그러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일들은 사전에 알 수 없다”고 했다. 

특히 그는 “선택과 집중, 신사업 발굴, M&A, 지배구조 투명화를 통해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비하는 게 필요하다”며 “이를 통해 회사의 존속과 성장을 지켜내고 임직원 및 고객, 주주, 협력사 임직원, 국민 여러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검찰이 의심하는) 합병도 그런 흐름 속에서 추진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사진= 시장경제신문 DB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사진= 시장경제신문 DB

 

합병 목적의 '정당성'... 공판 증인신문 통해 확인 

검찰은 옛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근본 목적이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 승계', 즉 ‘사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이 사건 공판을 통해 밝혀진 합병 전후 사정과 증인 진술을 종합하면 그 목적은 '두 기업의 시너지 창출과 경쟁력 제고'에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양사 합병 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한 증권사 임직원들은 일관되게 이같은 내용을 진술했으며, 검찰은 이를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합병이 무산됐다면 삼성의 경영권은 글로벌 해지펀드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총수일가 보유 지분이 취약한 탓에 외부세력에 의한 경영권 위협 우려가 상존한다"는 지적은 증권가로부터 꾸준히 제기된 사실이다.

단적으로, 합병 과정에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끼어들면서 경영권 위협은 현실화됐다. 엘리엇은 합병 이전 총수익스와프(TRS) 방식으로 공시 없이 삼성물산 지분 4.95%를 몰래 매입하고, 합병 발표 이후 계열 펀드를 통해 이 회사 주식 2.17%를 추가로 취득했다. 그 결과 엘리엇의 보유 지분 비율은 7.12%까지 늘었다. 

삼성물산 지분을 확보한 엘리엇은 합병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어깃장을 놨다. 경영권 분쟁을 통해 이익을 취하는 헤지펀드의 전형적 전술이었다. 합병이 성사되지 못했다면 최악의 경우 대한민국 대표 기업 삼성이 태극기를 떼고 다른 나라 국기를 붙이는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다른 쟁점사항에 대한 복잡한 법리 해석이나 팩트체크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적어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의 정당성'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만큼 입증됐다고 할 수 있다.
 

'증거재판주의' 원칙 준수돼야   

삼성의 핵심 경영전략인 ‘초격차’가 유지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경영 일선에서 이 회장의 진두지휘가 절실한 상황이다. 기업인으로서의 ‘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세밀한 경영 현안을 살피는데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인데, 수년째 지속되고 있는 ‘사법리스크’는 이 회장이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검찰은 이 회장에게 징역 5년에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1심 이후 검찰이 항소할 가능성이 큰 만큼, 향후 항소심과 대법원 판결까지 최소 3년여의 시간이 더 소요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회장은 최후진술 말미에 “저에게는 기업가로서 지속적으로 회사의 이익을 창출하고 미래를 책임질 젊은 인재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할 책무가 있다”고 했다. 아울러 “이병철 회장이 창업하고 이건희 회장이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시켜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늘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도 했다. 

이재용 회장에게 ‘기업가’로서의 책무가 있다면, 재판부에게는 ‘실체적 진실'을 발견할 책무가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법원은 증거재판주의 원칙에 반해, ‘여론 판결’을 내린 사례가 적지 않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주도한 일련의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서도 이같은 비판이 제기됐다.

증거재판주의는 ‘In dubio pro reo(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法諺)을 명문화했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를 더 쉽게 풀이하면 “피고인의 범죄 사실 증명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해도 좋을 만큼 확실해야 한다”는 말로 갈음할 수 있다.

106회 공판을 통해 확인된 사실에 근거한, 재판부의 편견없는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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