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초대석] 50년 양복 장인, "정부가 맞춤양복 명품화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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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초대석] 50년 양복 장인, "정부가 맞춤양복 명품화 나서라"
  • 배소라 기자
  • 승인 2022.12.23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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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Q테일러 장병석 대표 인터뷰
'손바느질 기술' 한국이 세계 1위
세계기능올림픽 양복 부문서 12연패
정부 나서 생산 설비와 재정 지원해야
패션산업 발전, 내수시장 살릴 수 있어
AQ테일러 장병석 대표. 사진=시장경제DB
AQ테일러 장병석 대표. 사진=시장경제DB

‘양복점 1번지’ 서울 소공동. 한때 이곳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용했다는 ‘세기’,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 현대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이 단골이었던 ‘해창’,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옷을 즐겨 맞춘 ‘잉글랜드’ 등이 몰려 있었다. 그 당시만해도 50~60개의 양복점이 성업 중이었다. 하지만 맞춤 양복산업이 1970~80년대 전성기를 지난 뒤엔 쇠락했다. 현재 서울 소공동은 양복 장인들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있다. 올해로 50년째 양복을 만들고 있는 장병석(70) AQ테일러 대표는 쇠퇴해가는 맞춤 양복산업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일흔살 ‘양복장인(匠人)’을 그의 일터에서 만났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 몸에 딱 떨어지는 양복 차림으로 그가 나타났다. 나이보다 한참 젊어 보였다. 선반 위에는 단골 고객들의 패턴이 담긴 서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묵묵히 한 길을 판 그에게서는 장인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손바느질 기술은 세계 1위입니다.” 장 대표의 말대로 한국인의 맞춤 양복 기술은 세계적 수준이다. 세계기능올림픽 양복 부문에서 1967년 첫 금메달을 딴 뒤 1983년까지 연속 12연패를 했다. 한국이 금메달을 독식하자 다른 나라들이 줄줄이 불참을 선언해 종목 자체가 없어졌다. 한국을 비롯해 이탈리아·프랑스·대만·중국 등 각국 양복장인들과 경연하는 세계주문양복연맹 총회 행사인 ‘양복명장 경기대회’는 지금도 해마다 열린다. 

장병석 AQ테일러 대표. 사진=시장경제DB
AQ테일러 장병석 대표. 사진=시장경제DB

그가 양복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세 때다.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명동 양복점에 들어가 봉제 기술을 배웠다. 그러길 7년, 재단사가 됐다. 군대 다녀온 3년 빼고 한 번도 쉬지 않고 외길을 걸어왔다. 장 대표는 재단사가 된 이후 양복 공부와 더불어 못다한 학업에도 매달려 대학을 마쳐 학사 재단사가 됐다. 디자인 강국인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 등을 찾아다녔다. 

“한국이 손 기술력은 좋은데 디자인 감각이 이태리보다 떨어져요.” 그는 맞춤 양복 종사자들의 연합체인 ‘세계주문양복연맹’ 총회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다들 자기가 만든 양복들을 입고 오는데, 이탈리아인들이 입은 양복은 매끈했다. 이탈리아엔 설립된 지 200년이 넘은 재단 학교가 있고, 여기서 인재들을 양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해외 재단 학교에서 발간하는 패턴 전문서적을 구해 연구해 나갔다.

이탈리아의 재단 학교를 보고 문화 충격을 받은 장 대표는 한국맞춤양복협회 회장을 하던 2000년대 후반, 후진 양성을 위해 노동조합과 함께 서울에 ‘테일러 아카데미’를 만들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행안부장관 표창과 후진 양성과 양복산업 발전 기여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일흔이 넘은 지금도 이탈리아 교재를 직수입해 번역한다. 단점이 보완되거나 달라진 유행을 계속 연구하기 위해서다. 장 대표가 한 자리에서 장수한 비결은 열린 자세와 공부 덕분이다. “전문가가 볼 때 잘 만들어진 양복은 고객도 틀림없이 좋아합니다. 그 정도 경지에 오르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의사와 똑같아요. 의대 나왔다고 모두 유능한 의사가 되는 게 아니라, 레지던트를 거쳐 과장 정도 돼야 실력이 좋아지는 것처럼요.”

장 대표는 양복을 만드는 소상공인들의 경영난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우리나라는 양복 만드는 기술력은 있는데 프랑스에 밀려 정작 명품 브랜드는 못 만들었습니다. 명품 브랜드를 만들고 기존의 명품들을 따라잡으려면 국가적인 지원과 자본력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장 대표는 맞춤 양복 명품화를 위해 정부의 지원이 확실히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재단사들은 대부분 소상공인이다. 샤넬도 옛날에는 소상공인이었다. 프랑스는 이미 100년 전에 사치품들을 명품화했다.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국가가 먼저 과감하게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수출 실적이나 새로운 아이디어 등을 따지기 때문에 기존 기술로는 지원을 받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기술력 좋은데 왜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세계에서 인정해주는 명품 브랜드가 없을까. 장 대표는 ‘사치품’이라는 단어가 왜곡됐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사치품은 돈 많은 사람이 애용하는 물건이잖아요. 그렇다면 돈 많은 사람이 아무거나 좋아하지 않잖아요. 잘 만들어진 걸 보고 인정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무조건 매장하는 이상한 문화가 있습니다. 서민인 기술자들이 만든 고급 제품을 돈 가진 자들이 사서 써야 서민도 살고 내수 시장도 삽니다. 그런데 마치 비싼 걸 사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여깁니다.”

AQ테일러 장병석 대표. 사진=시장경제DB
AQ테일러 장병석 대표. 사진=시장경제DB

장 대표는 맞춤 양복업계의 전설이다. 50여 년간 자리를 지킨 사람도 드물거니와 양복장인으로 유명하다. 그가 2000년도 AQ테일러를 인수한 후에는 당시 재벌 그룹총수 임원들이 단골손님이었다. 역대 국무총리, 국회의장들도 다녀갔다고 한다. 축구 국가대표 24명의 양복도 장 대표의 손으로 만들었다.

이런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도 코로나 앞에선 흔들렸다. 한때는 점포당 재단사가 4명씩 총 110여 명 정도 있었으나, 고급화되면서 양복단가가 오르고 기성복들이 난립하면서 현재는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줄었다. 하지만 코로나와 불황으로 맞춤 양복 문화가 점점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장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비즈니스 할 때는 신뢰감을 주는 양복을 입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아마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 대표는 앞으로 후진 양성에 힘쓸 계획이다. “한 10년 정도 후엔 기능 인력들이 다 사라질 것입니다. 맞춤양복협회에서도 숙원 사업인 후진 양성을 위한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 AQ테일러는.

"AQ테일러는 1960년 설립자 김학수 옹께서 소공동 반도 조선 아케이드에 창업한 곳입니다. 당시 수많은 산업일꾼과 일본인들이 즐겨 찾았습니다. 몇 년 후, 반도 조선 아케이드 화재사고로 무교동 대한체육회관 앞으로 점포를 이전했습니다. 1970년대에 조선호텔에 아케이드에 2호점을 개업하고 1979년 롯데호텔 개관하면서 아케이드 3호점 그리고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4호점을 열었습니다. 그 후 무교동 점과 조선호텔 점을 정리됐고, 1997년 IMF 사태로 롯데호텔 점과 현대백화점 점포만 남았습니다. 2000년도에 현대백화점 점포는 정리됐고, 롯데호텔 본점은 제가 넘겨받아 AQ테일러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 재단사로 걸어온 길은.

"1969년도 명동에 있는 양복점에서 처음 봉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작업실(공장) 직원 30여 명 점포 직원 6~7명이나 되는 아주 잘나가는 점포였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다 중퇴한 상태로 거기서 공부 대신 기본 심부름부터 2년간 봉제수습과 하의 수료를 마치고 상의 수습으로 진출했습니다. 22세에 입대 34개월의 병역의무를 마치고, 다시 못다한 상의 봉제를 1년, 도급제 객공 생활을 6개월 정도 했습니다. 밤에는 점포에서 숙직하고 낮에는 재단보조를 하면서 4년여의 기간을 마치고 1979년 조선호텔 아케이드 스코틀랜드 양복점의 재단사가 됐습니다.

1970년대 조선호텔은 서울 일류신사들과 미국에서 건너온 많은 양복 수출 바이어들이 장기투숙하고 외국 관광객들이 즐겨 찾던 아케이드이자 명소였습니다. 미국 양복전문업자들이 단골이었는데, 한국인 취향이나 체격여건이 달라 쉽게 완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 덕에 저는 30대 초 일찍이 재단사로서 좀 더 용이한 패턴시스템이 절실했습니다. 디자인 강국인 이탈리아 리가스 패턴시스템과 독일의 물러 시스템, 일본의 요소(20년 전 폐사) 남성 전문패션 월간지에 실린 패턴시스템들을 나름 분석해 결국 이태리의 황금체계를 과감하게 도입했습니다. 이후 여러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습니다만, 제게는 많은 고객에게 만족 드릴 수 있는 보람으로 이어지는 도전이었습니다."
 
- 체형에 맞는 맞춤 양복 만들 수 있는 비결은.

"사람들의 삶의 욕구지수가 높아지면서 양복 만들기는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사람들의 인체는 모두가 비슷해 보이지만 각기 생활환경나 습관 또는 타고난 유전적 요인에 따라서 개인차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좀 더 좋은 양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첫 번째 신체 치수를 정확하게 측정해야 합니다. 굴신이나 반신 등 골격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수치화해 인체 공학적 패턴시스템과 경험치를 체형에 잘 적용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가봉 후 보정도 정확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고객의 취향과 골격요건이 부합돼야 하고, 소재를 정확히 파악해서 그에 맞는 봉제가 이뤄져야 합니다."

- 성취감이 가장 컸을 때.

"2008년 사단법인 한국맞춤양복협회장 시절, '업계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하는 절절한 심정으로 사단법인 남성패션문화협회를 2년여의 각고 끝에 설립했습니다. 이후 남성패션문화협회가 중소기업청(現 중소벤처기업부)에 등록됐고, 맞춤 양복이 2011년 동반성장위원회에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선정됐을 때 커다란 훈장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온 힘을 기울여 각 관련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고 업계의 선대 회원님들의 동참이 있었기에 얻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나라 맞춤 양복 분야의 경쟁력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의류 업종 중에서도 맞춤 양복 산업은 사람 손이 많이 가는 노동 집약형 산업입니다. 국가적 명제인 일자리 문제를 중요하게 봐야 하는데 그에 부합 한국의 양복 기술력은 세계 최고를 이미 입증 한 바 있습니다. 쇠젓가락 문화가 바로 국제 기능 올림픽 양복 부문 12연패의 업적을 이뤄냈습니다. 업계 선대의 물심양면의 전폭적인 성원으로 금자탑을 쌓아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놀라운 양복 기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급 테일러링 인프라를 잘 살려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정책적으로 고급 맞춤 양복 기능인력을 양성하도록 정책을 펴가야 합니다. 소상공인집합체인 맞춤양복협회는 양복 기능인력의 산실로 76년의 전통이 있는 단체입니다. 정부가 장기적 안목으로 생산 설비와 재정지원을 한다면 생산한 제품으로 신규 브랜드를 론칭하고 고령화 사회에 기능을 갖고있는 고령자 유휴 인력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소질있는 청년들을 육성해 섬유 산업의 꽃인 패션 산업발전을 꾀 한다면 소비 촉진과 내수시장을 살려가고 수출로도 이어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급은 사치품이라는 인식 또한 바뀌어야 합니다. 고급기술을 가진 기능인력들은 서민 근로자들입니다. 고급은 마치 사치라는 프레임으로 기술 발전을 저해하고 소비를 저해해서는 국가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모든 산업 분야에 고급화는 놓쳐서는 안되는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실물 경제에 있어서 가성비도 중요하지만 산업발전과 장기적인 브랜드가치를 위해서는 정책적 혜안이 필요한 때 입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놓치게 된다면 머지않아 제조 기술강국에서 점점 설자리가 없는건 자명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나 유럽의 나라들은 일찍이 사치품산업들을 규합해 명품화 하는데 국가 사회가 나서 성공가도를 가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매년 봄가을로 개최되는 오트쿠튀르 고급패션쇼, 뉴욕의 프레타포르테 쇼, 이탈리아의 각종패션쇼 등이 국가 경제와 국격을 높인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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