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거래소 한 곳이 85% 독식... 뒷짐 진 공정위 [시경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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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화폐거래소 한 곳이 85% 독식... 뒷짐 진 공정위 [시경pick]
  • 유경표 기자
  • 승인 2023.11.1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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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사각지대에 '독점 시장'된 가상자산 거래
원화 거래소 5곳 중 한 곳이 점유율 85% 장악
나머지 4곳 점유율 모두 합쳐도 15% 불과
거래소 간 '부익부 빈익빈' 현상 심화
공정위도 개입 꺼려... 투자자 피해 우려
국회서도 '공론화'... '선제 대응' 필요성 제기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고대 그리스 테살리아의 왕 에리식톤은 농경의 여신 데메테르로부터 영원한 기아(飢餓)에 허덕이는 끔찍한 저주를 받습니다.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그는 부유했던 재산을 모두 식량을 사는데 탕진하고, 딸까지도 팔아넘겼다고 하지요. 급기야 자신의 몸을 먹어치우기 시작했고 끝내는 이빨만 남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에리식톤의 이야기는 오늘날 경제학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습니다. 가령, 기업의 독과점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한 기업이 시장의 대부분을 집어삼킬 정도로 커지면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뒤따릅니다. 경쟁사들의 견제가 힘을 잃으면서 시장의 자정작용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에리식톤과 같은 식탐으로 시장지배적 지위에 오른 기업은 비대해진 몸뚱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점차 경쟁력을 잃어가는 단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 같은 부작용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요 선진국은 공정거래법을 제정, 기업의 독과점 실태를 엄격히 관리·감독하고 있습니다.

국내 가상화폐 시장에 이미 5곳의 원화거래소가 운영 중이고, 관련 기업과 종사자 규모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가상자산을 새로운 파생 상품으로 인식하고, 투자에 나선 시장 참여자는 국내에서만 수백만에 달합니다.

가상화폐 시장조사업체 코인게코에 따르면, 국내 가상자산 거래 시장은 한 곳의 독점 기업과 다수의 'the others'로 구성돼 있습니다. 5곳의 원화거래소 중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A거래소의 점유율은 85%. 나머지 15%를 다른 4곳이 분점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그 독점 구조가 더 견고해 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올해 6월 30일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을 위한 법률’(가상자산법)이 제정됐지만 이미 형성된 독점 시장 구조를 해소하기엔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무엇보다 해당 법률은 이른바 1단계 입법으로, 가상자산 투자자(이용자) 보호에 방점이 맞춰져 있을 뿐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금지’와 같이 독과점을 방지하기 위한 조항은 빠져 있습니다.

정부가 연구용역을 발주한 2단계 입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가상자산 시장의 불공정거래 실태는 규제 사각지대에 방치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업계 안팎에서는 "공정위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시장의 왜곡은 더욱 심화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용자인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2일 공정위에 허위정보 표시로 10억원 과징금 철퇴를 받은 넥슨. 최근 출시된 ‘오버히트 3월 영웅 패키지’ 광고에서도 과장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시장경제DB

 

가상자산 거래 '독점' 논란... 침묵하는 공정위

지난해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따르면, 국내 가상화폐 시장 규모는 2021년 말 기준 55조2000억원에 달했습니다. 1일 평균 거래액만 따져도 11조3000억원의 거대한 시장입니다.

시장에서 독주체제를 구축한 A거래소는 2021년 한해에만 매출 3조7046억원, 영업이익 3조2714억원을 올렸습니다. 영업이익률은 무려 88.3%에 달했습니다.

반면, 다른 원화 거래소 운영 기업들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올 들어 가상자산 시장이 약세를 보이면서, 이들 거래소 운영 기업들의 수익성은 급락했습니다.

점유율 2위 B거래소는 올 2분기 영업손실 34억원, 당기순손실 85억원을 기록하며 적자로 돌아섰습니다. 이달 9일 금융정보분석원 조사 결과, 21개 가상자산 거래소 중 10곳은 수수료 매출이 전무했습니다. 심지어 18곳은 완전자본잠식 상태로 알려졌습니다. 일부 거래소는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고육책으로, ‘수수료 제로’와 같은 극단적 방법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가상자산 업계 한 관계자는 “회사가 사실상 수수료 수익을 포기한 것이니 극약처방을 내린 것과 다름없다"며 "9대 1에 달하는 점유율 구도를 깨고 이용자를 조금이라도 더 끌어 모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라고 말했습니다.

독점규제및공정거래에관한법률(이하 공정거래법)은 '시장지배적 지위' 판단 기준으로, '1개 사업자의 시장점유율이 50% 이상이거나, 3개 이하 사업자의 시장점유율 합계가 75%이상인 경우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추정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같은 법 제6조). 

이 기준에 따르면, 점유율 85%를 넘나드는 A거래소는 명백한 '시장지배적 사업자'입니다. 그럼에도 A거래소는 공정거래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입법의 부재가 직접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정위는 2018년 가상자산 거래소에 대해 ‘통신판매업자’가 아니라는 유권해석을 내렸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자상거래법 등을 적용할 수 없게 되면서, 가상자산 거래 관리·감독 전반에 공백이 발생했습니다. 

사진=빗썸
사진=빗썸

 

국회서도 '가장자산 거래 독점' 공론화

학계와 업계는 물론이고 정치권에서도 가상자산 법제의 신속한 정비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가상자산 시장이 법제화되고 있지만 시장지배적 사업자 규제는 미흡한 수준"이라며 "공정위와 같은 기관에서 독과점에 따른 잠재적 리스크를 들여다보고, 폐혜를 시정할 수 있도록 나설 필요가 있다"고 전했습니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10월 공정거래위원회에 대한 정무위 국정감사에서 ”(가상자산 분야) 법적 기반이 약하긴 하지만, 특정 거래소의 시장점유율이 80%에 육박해 독점성이 강하다"며 정부 당국의 선제적 대응을 주문했습니다.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2021년 10월 국정감사에서 “특정 거래소의 시장 점유율이 88%에 이른다"며 "독과점 시장이 형성되면 가상자산 거래소가 멋대로 상장 또는 상장 폐지하거나, 거래 수수료를 마음대로 올리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 교수는 “어느 시장을 막론하고 독과점이 위험한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다만 가상자산 시장은 제도적으로 아직 정형화되지 못한데다 거래소들의 지나친 난립도 문제가 있는 만큼, 투자자들이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업체 위주로 경쟁체제를 구축해 시장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한편, 가상자산 시장을 국내만으로 한정할 수 없는 만큼 특정 거래소가 시장을 독점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반론도 존재합니다.

이상승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올해 3월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열린 가상자산 컨퍼런스 'DCON' 주제발표에서, “가상자산 거래소의 지리적 시장을 국내로 한정하기 어렵다“며 ”해외 기업으로부터의 경쟁 압력을 무시하고, 높은 국내 점유율만 가지고 규제 정책을 수립하면 오히려 국내 선두 기업의 경쟁력만 훼손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만, 이 교수도 “점유율이 높은 기업은 언제든지 힘을 남용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며 “금융당국은 점유율이 높은 기업이 있으면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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