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법 구멍, 영유아는 괴롭다... 공포의 '직장 어린이집 앞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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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법 구멍, 영유아는 괴롭다... 공포의 '직장 어린이집 앞 시위'
  • 유경표 기자
  • 승인 2023.03.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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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총수 대상 집회 증가 추세, 부작용 속출
관, 상복, 만장 등 동원, 선정적 퍼포먼스 난무
집회 주변 '장송곡'... 볼륨 높여도 단속 안 돼
어린이집, 집회·시위 금지 대상서 제외
직장 어린이집 대부분, 사옥 내 입주
"소음에 노출된 영유아... 정서 발달 악영향"
워킹맘 "과격한 구호... 몇 달씩 이어지기도"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서울 서초동 삼성타운, 여의도 LG트윈타워, 종로 SK서린빌딩, 양재동 현대·기아차빌딩. 기업 혹은 기업 총수를 상대로 한 집회·시위가 빈번하게 열리는 단골 소재지이다. 매우 흔하게 엠프를 동원한 마이크가 사용되며, 시신 운구에 쓰이는 관과 상복, 만장(輓章) 등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고막을 찌르는 '장송곡' 역시 집회 주최 측이 애용하는 선전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기업을 겨냥한 집회·시위가 늘어나면서 '영유아'에 대한 보호조치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주요 대기업 본사에는 대부분 임직원 자녀를 위한 어린이집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초·중등학교 주변 집회와 시위를 제한 또는 금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같은 법 제8조 5항 2호 참조). 유치원과 특수학교도 집회·시위를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 교육기관에 포함된다. 그러나 어린이집은 제외돼 있다. 초중등교육법상 어린이집은 '교육기관'이 아니다. 관리·감독기관도 지방 교육청이 아닌 관할 기초자치단체이다. 집시법이 '초·중등 교육기관'만을 보호대상으로 규정하면서 초래된 입법의 불비(不備)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기업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영유아들은 집회·시위로 인한 피해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집시법이 사생활의 평온, 초중등학생의 학습권 보호를 금지·제한의 근거로 규정하고 있는 사실을 고려하면, 건강권과 행복추구권을 비롯한 영유아 기본권 침해를 법률이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자료사진)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 모습. 사진=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 모습. 사진=연합뉴스

 

집회·시위, 직장 어린이집 영유아 정서에 악영향

영유아보육법은 여성근로자 300명 이상, 상시 근로자 500명 이상 사업장을 '직장 어린이집' 의무 설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상당수 주요 기업 사옥에 어린이집이 입주해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5월 보건복지부와 고용노통부가 합동으로 발표한 '2021 직장 어린이집 설치 의무이행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상 사업장 1486개소 중 90.9%에 해당하는 1351개소가 직장 어린이집을 설치했거나 위탁보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기업 내 어린이집은 관련법에 따라 저층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 집회 소음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영유아보육법에 따르면, 직장 어린이집은 안전사고와 재난에 대비한 시설 등을 갖추고, 건물 내 '5층 이하'에 설치돼야 한다. 

대기업 직장인이자 워킹맘인 A씨는 "예전에 어떤 사안으로 사옥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어린이집이 저층부에 있어 소음에 적나라하게 노출됐다"며 "시위 과정에서 나오는 장송곡 같은 노래를 아이들이 유행가인줄 알고 따라 부르더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시위 현장에는 현란한 조형물이나 빨간글씨 등을 설치하는데, 여기에 아이들이 쉽게 눈을 사로잡히게 된다"며 "정제되지 않은 말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퍼지는데다, 길게는 몇 달씩 집회를 하는 경우도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특히, 현행 집시법에서는 해가 뜨는 오전부터 해가 지는 오후까지 집회를 허용하고 있는데, 이는 어린이집의 일과시간과 겹친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어린이집에 등원한 영유아들이 귀가할 때까지 하루 종일 시위 소음과 공포에 시달리는 셈이다. 

대기업 직원 B씨는 "시위가 보통 출퇴근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많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며 "어린이집에 간 아이들은 아침에 조금 자고 일어나 점심먹고 또 자야 하는데, 소음 때문에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아울러 "아이들은 선생님 인솔에 따라 어린이집 주변을 산책하곤 하는데, 사옥 앞에 시위대가 있으면 꺼려지고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육아·보육 전문가 C는 <시장경제>와의 통화에서 "영유아는 오감이 발달되는 시기인데, 부정적인 언어나 소음에 노출되면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시위 등은 아이들에게 두려움이나 공포로 느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아이들은 소리를 통해 발달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시기에 아름다운 소리를 많이 들려줘야 한다"면서 "상호작용 속에서 안정된 소리를 들려줘야 정서적으로 균형감있게 자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시위 소음에 관대한 대한민국... 美·獨, '엄격' 적용

우리나라의 집회·시위 소음 기준이 해외 선진국에 비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집회·시위 소음으로 국민 기본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강화된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내의 경우, 집회 소음은 10분간의 평균소음을 의미하는 '등가소음'과 '최고소음'으로 나뉜다. 등가소음은 한 번, 최고 소음은 1시간에 3회 이상 기준을 초과하면 위법이다. 법률이 허용한 소음 기준은 주간 주거지역에서의 등가소음 65db 이하, 최고소음 85db 이하이다. 10db이 증가하면 실제 소음은 10배 커진다.   

현행법에서의 규제는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순간적인 고음을 방출할 때 이를 규제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도 있지만, 소음 규정 위반에 대한 별도의 과태료 규정이 없어 실효성 측면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2019년 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 발행 자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상 소음규정에 대한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보면, 소음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각각 심리적 부분과 신체적 부분으로 나뉜다.  

40db이 넘는 소음은 업무나 학습에서 집중을 방해하고, 70db 이상은 짜증과 수면방해를 유발할 수 있다. 신체적으로 90db이 넘으면 위장장애가 발생할 위험이 있고, 100db을 초과하면 정서적 불안과 소음성 난청 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분석이다. 

위 연구결과는 성인을 기준으로 한다. 어린 영유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보다 더 심각할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국내와 비교할 때 해외 선진국의 집회 소음 규제는 매우 엄격하다.

미국 뉴욕에서는 집회 시 확성기 등을 사용하려면 허가신청서를 제출토록 돼 있다. 해당 신청서는 집회가 예정된 일자마다 매일 뉴욕시 경찰서장에게 제출해야 한다. 신청서에 기재되지 않은 장치 등을 사용하면 압수·몰수 당할 수 있고 벌금도 부과된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집회신고서 외에 별도 소음허가신청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한 번 신고로 확성기 등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연방환경오염방지법에 '소음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한 기술적 안내' 항목에서 집회 소음 허용 기준을 명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주간에는 30db, 야간에는 20db 이상을 초과해선 안된다.

프랑스에서도 옥외 집회의 경우에는 주최자가 규정된 양식에 따라 환경영양평가 증명서를 작성, 파리 경시청에 제출해야 한다. 집회 소음이 공공안정에 미치는 영향을 집회 주최자들이 먼저 고려한다는 의미다. 소음 기준도 주간에는 주변 배경소음 대비 5db을 넘을 수 없고, 야간에는 3db를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홍세욱 변호사(법률사무소 바탕)는 "집회 주최자들이 현행 기준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경향이 있다. 등가소음은 10분간 평균소음기준을 넘지 않도록 조절하고, 최고소음은 1시간에 2회만 초과하는 방식으로 단속을 피하고 있다"며 "국내 기준은 외국에 비해 데시벨(db) 기준 자체가 완화돼 있고, 사전에 소음규제를 엄격하게 하지 않는 등 비교적 약하다는 의견이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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