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자형 장기불황 온다, 규제 풀고 週52시간부터 바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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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자형 장기불황 온다, 규제 풀고 週52시간부터 바꿔라"
  • 양원석 기자
  • 승인 2020.04.10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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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대기업집단 임원, 경제단체, 학계 전문가 '한 목소리'
'규제'에서 '지원'으로... 정부, 과감한 방향 전환 불가피"
기업실사지수, IMF 이후 최저치... "정책 최우선 순위 '기업 살리기' 돼야" 
사진=시장경제신문DB
사진=시장경제신문DB

“요즘 정말 어렵습니다. 여행 관광 레저 사업만이 아니고 중국에서 원·부자재를 들여오는 제조업은 다 마찬가지라고 보면 됩니다. 계열사 대부분이 허리띠를 졸라맨 비상경영 상항입니다. 가장 심각한 건,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겁니다.”

국내 10대 기업집단 소속 임원 A는 최근 기자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이 회사의 올해 1사분기 잠정실적은 비교적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A는 “지금부터가 진짜 위기”라며 “경계를 늦출 수가 없는 비상 시국”이라고 덧붙였다.

코로나19發 경제위기가 전 세계를 덮치면서 국내 기업들이 느끼는 체감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다. 국내 주요 대기업집단 임원들은 현재 상황을 1997년 IMF 구제금융 당시와 비교하면서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위기”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최악의 경우 3분기를 넘어 4분기까지 불황이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들의 분석치는 주요 기업 임원들의 진단과 거의 일치했다.

취재 중 만난 기업 임원과 경제단체 관계자들은 정부의 한 박자 빠른 선제적 규제개혁을 주문했다. 공급과 소비, 투자가 동시에 급감하는 recession(경기 불황)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조속한 경기 반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규제 위주’ 경제정책의 방향 전환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과 대한상의 등 경제단체는 정책 방향 전환과 함께 ▲대형마트 휴일 영업 허가 ▲주52시간 근로 예외 확대 ▲기업활력법(원샷법) 적용 대상 확대 ▲금융사들의 주식 반대매매 일시 중지 ▲미국, EU, 일본 등 주요 기축통화국과의 무기한·무제한 통화스왑 체결 ▲한국 기업인 입금금지 해제 ▲공세적 다자·양자 FTA 추진 ▲추경의 파격적 확대 ▲피해지원절차 개선 및 대상 확대 ▲금리 인하 ▲임시공휴일 지정 등도 건의했다.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들이 정부를 향해 구체적 방법론이 담긴 건의안을 전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기업 현장에서는 어느 때보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크다.

공정경제와 상생을 강조하며 대기업을 ‘규제의 대상’으로 보는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지 않도록 실효적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현장의 요구이다.    

◆공급·소비·투자 '트리플딥'... 세계적 경기 불황, 연말까지 갈 수도

“1분기는 예년 수준인데 글로벌 시장이 어려워지고 각국 방역정책으로 (생산라인이) 셧다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비 둔화로 감산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 결과가 2분기와 3분기에 반영될 예정입니다. 연말까지 갈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또 다른 대기업집단 임원 B는 향후 경기전망을 더 어둡게 봤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은 2분기 실적부터 반영될 것이라며, 불황 장기화 가능성을 경고했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경기실사지수(BSI : Business Survey Index) 조사 결과, 4월 전망치는 59.3을 기록했다. 2009년 1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52.0을 찍은 이후 135개월만의 최저치다. 3월 실적치 역시 65.5로 2009년 2월 이후 133개월만에 가장 낮았다. 

기업들이 현재 상황을 97년의 IMF나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더 심각하다고 인식하는 근거는 위기의 본질이 전혀 다르다는 데 있다. 두 번의 경제위기는 모두 금융정책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원인이 명확했으므로 해법 또한 정해져 있었다. 중앙은행이 나서 돈을 풀고, 현금 유동성이 막힌 기업들의 신용경색을 풀어주는 방식으로 처방이 시행됐다. 국가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경제 생태계 회복은 시간 문제였다.

금융위기를 주요 원인으로 하는 경제위기는 대체로 그 해법이 위와 같다. 핵심은 막힌 돈줄을 풀어주는 데 있기 때문에, 금융정책을 전환하면 해법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그 출발이 비경제적, 비금융적 요인에 있다는 점에서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경제위기의 근원은 바이러스 팬데믹에 있다. 근본적인 해법 역시 기업 경영진이나 경제관료가 아닌 의학, 제약학 전문가들에게 달려있다. 가장 확실한 해법은 백신의 개발이다. 치료제 개발 역시 현재 상황을 끝내는 데 있어 결정적 변수가 될 수 있지만 재확산 방지를 위해서는 백신 개발이 더 시급하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글로벌 제약사, 각국의 보건 당국이 백신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성공까지는 갈 길이 멀다. 임상 단계를 아무리 줄여도 신뢰할 만한 데이터를 확보하려면 개발 기간을 18개월 미만으로 줄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변종 코로나19에도 쓸 수 있는 범용 백신이 개발돼, 충분한 양이 전 세계에 보급되기까지 그 빈틈은 각국 정부와 기업이 메워야 한다. 

현재 위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공급과 소비, 투자가 동시에 부진하다는 데 있다.

바이러스 확산 흐름에 따라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에 있던 중국 내 생산시설이 문을 닫았고, 동남아시아, 유럽, 북미 공급망도 연쇄적으로 가동을 멈췄다. 원·부자재 공급이 끊기면서 완성품 제조 기업도 조업을 중단했다. 글로벌 공급망이 이처럼 빠른 시간 안에 붕괴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공급이 부족하면 수요가 급증하면서 가격이 오르는 것이 일반적 경제 원리이나 지금은 소비마저 줄고 있다. 팬데믹 공포에 각국 정부가 이동제한에 나서고, 전 세계를 이어주던 하늘길, 바닷길이 끊어지면서 백화점, 할인점, 면세점, 호텔, 여행, 관광 업계는 고사 직전으로 내몰렸다. 감염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정부의 이동제한 명령 여부와 무관하게 스스로 격리된 삶을 선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심리 위축은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공급망 붕괴, 소비 급감은 투자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공급, 소비, 투자가 모두 내리막을 걷는 현재 상황이 2분기 이상 지속된다면 현금 유동성에 약점이 있는 기업들은 자금난을 견디기 어렵다. 국내 대기업집단이 올초 편성한 예산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긴축 경영에 나선 것은 이 때문이다.

위기 종료 시점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기업 임원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바이러스가 시차를 두고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글로벌 경제 위기가 조식에 종식될 것이란 기대는 사라졌다. 4월을 정점으로 바이러스 확산세가 꺾이는 모습을 보였다면 ‘V’자형 반등도 기대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L'자형 장기 불황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경기 저점 통과 시기를 앞당기거나 ‘L’자형 장기 불황의 늪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의 정책 전환이 뒷받침 돼야 한다. ‘대기업 규제일변도’ 경제정책으로는 위와 같은 목표 달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현장 의견, 정책 반영 미흡... 정부, 기업 '체감 위기' 온도차

기업 현장의 요구는 명확하지만 정부의 움직임은 기대치를 밑돌고 있다. 정부가 기업 의견을 수렴하고 있지만 정책에 반영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경영진단 전문가인 대기업 임원 C는 "정부 청사로 기업인들을 불러놓고 의견을 듣는다고 하지만 바뀌는 게 없다"고 꼬집었다. 경제단체 관계자 D는 "의견수렴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실천이 필요한 때"라며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상법, 자본시장법 등 상사법률 개정 현안이 있을때마다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교수 E는 "정부의 현실 인식이 아직도 안이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대형마트 휴일 영업 허가나 주52시간 근로 예외는 정부가 비상한 각오로 나선다면 바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사안"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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