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보길의 역사 올레길]전염병에 죄수들 떼죽음..."공산당은 콜레라다"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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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보길의 역사 올레길]전염병에 죄수들 떼죽음..."공산당은 콜레라다" 선언
  • 인보길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
  • 승인 2016.06.2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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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감옥6년’ 이승만(5) 콜레라 기습

무서운 전염병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었다.
1902년 8월 시베리아 연해주 일대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북한지역을 지나 한양을 덮쳤다.
하수도는 물론 상수도도 없이 우물과 개울물을 먹고 빨래하고 목욕하며 사는 한양시민들,
비가 오면 진흙인지 오물인지 악취가 진동하는 왕국의 수도(당시 일본신문 보도)는 콜레라의 천국이라고나 할까. 날마다 수백명의 시체가 시구문(屍口門: 광희문)과 서소문으로 실려 나가는 죽음의 도시로 변해버렸다.(제국신문,1902.9.20.)

“....옥중에 괴질이 먼저 들어와 사오일동안에 육십여명을 목전에서 쓸어내일 새, 심할 때는 하루 열일곱 목숨이 내 앞에서 쓰러져 죽는 자와 호흡을 상통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 곧 시신과 함께 섞여 지냈으되 홀로 무사히 넘기고....”(리승만 ‘옥중전도’ 1903년 [신학월보] 5월호). 이승만의 옥중 콜레라 체험 후일담이다.

위생은커녕 식사도 열악한 한성감옥 죄수들이 병마에 줄줄이 쓰러지자,
이승만은 밤을 새워 환자들을 돌보면서 시신을 거두었다.
미국 선교사 에비슨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여 달려왔지만 무슨 까닭인지 당국에선 감옥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승만은 에비슨에게 약을 부탁하여 환자들에게 먹이고 두손을 잡고 울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 이승만(중앙)과 함께 감옥에서 성경공부를 하던 동지들이 성경책을 들고있다. 이승만 앞의 어린이는 아들 봉수.

감옥 당국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물도 주지 않았으며 간수들은 가망없는 환자들을 문밖에 내놓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발로 툭툭 차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콜레라의 맹위로 시체가 쌓이는 한성감옥, 삶과 죽음이 뒤엉킨 생지옥에서 이승만이 헌신적으로 고군분투 환자들에게 정성을 쏟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죽는 자의 영혼을 구하라’는 깊은 신앙심의 발로였다.
마지막 길을 떠나는 동료죄수들에게 그는 ‘영생의 구원’을 전하는 기독교 사제와 같은 존재였으며 고통에 울부짖는 환자들은 “이승만” 이름을 부르며 몸부림치다가 눈을 감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적어놓은 40여가지 문서에는 [감옥서 사망자 기록: Obituary of Kam Ok Su, 1902]라는 영문 명단이 남아있다. ‘여자 죄수, 두 살짜리 딸을 남기고 죽음’ ‘하루아침에 10명 콜레라로 죽음’등 감옥에서 죽은 사람들의 상황을 일일이 메모했고, 12월엔 ‘모두 84명’
이라고 적었다.
그가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것은 콜레라 환자들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유서를 지닌채 형장에 끌려간 죄수나, 재판도 없이 사형당한 독립협회 초대회장 안경수의 선고문은 이승만이 그대로 베껴서 보관하기도 했다. 2년간 함께 옥살이하다가 처형된 장호익은 세 번째 칼날이 내리칠 때까지 만세를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 한성감옥에서 이승만이 영문으로 기록한 사망자 명단(Obituary of Kam Ok Su, 1902~1903)의 첫부분이다.

감옥서 안에 있는 사형장으로 가는 죄수들도 구원을 청하듯 “이승만” 이름을 부르짖곤 했다.
교육과 전도와 찬송가로 맺어진 [감옥학교 형제자매]들에게 그러나 이승만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편안히 돌아가시오’라는 한마디 뿐이었다고 했다. (자서전 초록)

“이 험하고 험한 중에서 험한 괴질까지 겪으며 무사히 목숨을 부지한 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보호하신 은혜가 아니면 인력으로 못 하였을 바이오...” 어려운 가운데 ‘무릎꿇고 기도할 양이면 하나님이 오셔서 머리에 두 손을 얹으시고 나와 같이 기도해주시는 것 같았다’고 이승만은 두고두고 회고한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형과 콜레라]를 직접 체험하면서
그의 기독교 신앙은 확고히 뿌리내렸고 훗날 독립투사로서 남다른 사생관(死生觀)이 이때 감옥에서 확립되었던 것이다.

▲ 해방후 귀국한 이승만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단결을 호소했다.

콜레라와 관련하여 이승만이 행한 흥미로운 연설들이 있다.
40여년 세월이 지난 1945년 미국서 귀국한 이승만은 ‘인민공화국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공산당 박헌영의 제안을 웃음으로 넘기고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란 유명한 연설을 한다.

“건설자와 파괴자는 협동이 못되는 법입니다. 건설자가 변하든지 파괴자가 회개하든지 하여
같은 목적을 가지기 전에는 협동은 되지 못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호열자(虎列刺:콜레라의 음역)와 같습니다.
인간은 호열자와 함께 살수 없습니다.
친부모나 형제자매라도 호열자에 걸리면 격리시켜 치료해야 합니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이 한국 사람의 형용(形容)을 하고서 우리 것을 빼앗아 저희 조국에 갖다 붙이려는 것은
결코 허락할 수 없으니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놓고 싸울 결심입니다.”

또 하나의 연설은 6.25 휴전후 1954년 미국을 공식방문 했을 때 미국인들에게 한 것이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간의 투쟁에 있어서는 중립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일어나서 공산주의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공산주의와 싸울 때는 전염병과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지구의 반은 공산주의 노예상태로 변할 것입니다.”

이승만은 일찍이 1923년 하와이에서 자신이 발행한 잡지에 레닌의 공산혁명을 비판하는 논문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을 발표했다.
소련 공산주의가 전세계를 전염병처럼 휩쓸 때 그 허구를 최초로 폭로한 논문이다.
그는 국제공산주의를 알게 되자마자 일본 제국주의보다 더 악랄한 전체주의-신식민주의로 낙인찍었다. 일본이 물러간 조국을 러시아 식민지로 내줄 수는 없는 것!
걸리면 고칠 수 없이 목숨을 포기해야했던 콜레라,
공산당의 본질을 꿰뚫은 이승만이 있었기에
반쪽이나마 자유민주공화국이 번영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 2013-07-24 09: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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