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人] 한국판 쉰들러 "납북자 구출, 숨 다할 때까지 안 멈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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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人] 한국판 쉰들러 "납북자 구출, 숨 다할 때까지 안 멈출것"
  • 박주연 NGO저널 기자
  • 승인 2023.06.28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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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룡 (사)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납북자가족모임 대표)

<편집자註> 시민사회는 '시대의 창(窓)'일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여론 형성의 장(場)'입니다. 세상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읽지 못하고선 미래를 꿈꿀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人)과 쉴새없이 소통하는 시민단체 속 각양각색 사연을 [스토리人] 코너를 통해 소개해 드립니다.  

나치 위협을 피해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왔던 독일 사업가 쉰들러 리스트를 연상케 하는 한국의 인물이 있다. 최성룡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 겸 납북자가족모임 대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물론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끌려간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을 구출하는 일에 자신을 던진 ‘휴머니스트’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인생 후반전을 사람을 구하는데 오롯이 쓰고 있는 그의 삶은 급기야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에게까지 영감을 줬다.

어쩌면 올해 또는 내년에 넷플릭스를 통해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담은 영화를 보게 될지 모른다. 최 대표는 그 공을 인정받아 지난달엔 북한인권단체로부터 '물망초인(人)'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보훈의 달’과 잘 어울리는 최 대표를 NGO저널이 만났다. 그는 인터뷰 중 종종 만감이 교차한 듯 울컥하는 모습이었다. 최 대표는 납북자가족모임 모토로 보이는 “Come Back Home KL08240 유격백마부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 하자 죽어서도 충성하자” 이 문구를 기사에 꼭 넣어달라고 했다.

납북 부친을 되찾기
납북 부친을 되찾기 위해 시작한 NGO 활동이 23년째 이어지고 있다. 진지한 얼굴로 임하던 최성룡 대표는 "요새 손주들 유치원에 출퇴근 시키는 재미로 산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 단체가 언제 만들어졌습니까?

“김대중 정부 때 제가 납북자가족모임을 만들었습니다. 2000년 9월 정부가 비전향장기수 63명을 송환한 일이 있었어요. 제가 앞장서 반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납북자, 국군포로부터 한 명이라도 데리고 오라고 말이죠. 정부는 단 한 명의 납북자나 국군포로를 데리고 오지 못했어요. 남북 의 ‘6·15 공동선언’의 합의를 이행한 것이지만,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때 이후로 제가 나서서 납북자 구출에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투쟁하기 시작했습니다.”

- 그러면 올해로 23년째 아닌가요? 생업도 있으셨을 텐데요.

“당시는 수협에서 근무했습니다. 조합장이나 직원들이 제 활동을 이해하고 많이 양해해줬지요. 그렇게 어느 정도 활동하다 그만두고 이 일에만 뛰어들었습니다.”

- 이 일에 절박함을 느끼고 뛰어든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2002년 4월 북한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이산가족 상봉에 제 모친이 포함된 일이 있었어요. 그때 북한은 아버지 생사 여부를 알려주지 않더군요. 행사장에서 어머니가 항의하다 급기야 실신했어요. 저는 그때 당시 속초 모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이 일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더군요. 우리 정부의 태도나 언론의 모습을 보면서 납북자 생사 확인조차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납북자 문제나 이런 현실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활동 내용을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것 때문에 저를 미워하는 사람들, 관계기관도 생기더군요. 하하. 2005년 돌아가신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하셨습니다. 1993년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가 북송되는 장면을 TV로 보시고는 북에 있는 아버지 유해를 꼭 찾아 합장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제 개인으로서도 절박한 심정으로 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최대
최 대표는 2002년 남북이산가족 상봉 경험을 통해 정부와 언론 보도 태도를 보면서 납북자 문제 해결이 쉽지 않겠다고 느꼈다고 한다. 정치논리에 인권 문제가 제대로 제기될 수조차 없었던 탓이다.

 

납북된 부친, 기다림의 한(恨)을 딛고

- 최 대표님 아버님은 어떻게 납북되신 겁니까?

“아버지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어선 세 척을 운영하며 선박사업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선원이 부족하면 같이 어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기도 했어요. 한번 나가면 15일 걸립니다. 그러다 1967년 어로 작업을 하던 중 북한 무장선에 납치됐어요. 제가 15살 학교에 있을 때였어요. 그땐 어머니가 그 일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으시더라고. 어머니는 굉장히 강한 분이지만 여자가 배 사업을 하기는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여자가 배 타는 것도 금기였잖아요. 지금은 좀 다르지만.

그 이후 남은 배로 빚 청산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아버지 구제 문제를 더 절감하게 되었지요. 국가 문제도 큽니다. 자국민이 범죄집단에 납치됐는데 보호해줄 생각은 않고 오히려 색안경을 끼고 본 것 아닙니까. 당시 연좌제로 인해 신원 조회당하고 공무원 임용도 안 되고...납북자 가족들 고통 많이 받았습니다. 가족이 북한에 끌려갔는데, 우리 정부는 연좌제 씌워 의심하고 차별하고 남은 가족들도 나 몰라라 했으니까요.”

최 대표의 부친 최원모씨는 6·25전쟁 당시 미국 사령부가 조직한 북파 공작원 첩보부대 ‘켈로부대’의 선박 대장으로 활약했다. 최씨는 1967년 6월 5일 연평도 근해에서 조업하다 북한 무장선 10여척에 포위돼 납북됐다. 북한은 최씨가 전쟁 때 좌익분자를 토벌한 공을 알고 전향을 유도했고, 최씨는 북의 회유를 거부해 인민재판에 회부, 처형됐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최씨를 국가유공자로 인정,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 납북자 구출을 직접 하셨다고요?

“2000년도 4월에 납북자 이재근 씨를 최초로 구해왔습니다. 그동안 북한에 정보원을 심는 등 미리 작업해놓은 것을 바탕으로 구출 활동을 직접 시작한 것이죠.

최 대표는 2000년부터 현재까지 국군포로 12명과 납북자 9(직접 구출 8명, 개입한 구출 1명)명을 탈북시켰다. 2004년에는 건국 이후 최초로 국군포로 백종규 하사 유해를 송환했다. 납북 일본인 요코다 메구미 남편이 한국에서 납북된 김영남임을 언론에 최초 공개한 이도 바로 최 대표다. 더 나아가 납북자가족모임과 일본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납북학생 가족의 DNA를 채취했고, 이 과정에서 김영남의 어머니가 최계월임을 증명했다. 2006년 6월 금강산에서 납북자 김영남과 그의 어머니 상봉을 성사시켰다.

제 어머니가 강한 여성이라고 소개했잖습니까? 어머니도 6·25 참전군인이었습니다. 종아리에 포탄 파편을 맞아 구멍이 났던 흔적이 있어요. 상이군인 신청을 하면 국가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도 “내가 생선장사라도 해서 너희를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데 왜 국가에 그런 걸 바라느냐”고 신청하지 않으셨어요.”

최 대표의 모친 고(故) 김애란 씨는 2017년 6·25 참전용사로 인정받았다. 최 대표가 2016년 말 군 당국에 모친의 참전 사실 확인을 요청했고, 군은 심의를 거쳐 이를 확인해줬다. 김 씨는 6·25 전쟁 기간 '8240 유격백마부대' 부대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됐다. '켈로부대'로 통하는 8240 유격백마부대는 첩보활동을 주로 한 부대로, 6·25 전쟁의 판도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에도 기여했다.

최 대표는 2018년 6월 5일 국립현충원 충혼당에 부친의 위패를 봉안했다. 모친의 유골과 합동 봉안했다. 현충원에 납북자 위패가 봉안되고, 사망일이 아닌 납북일(1967년 6월 5일)이 기입된 경우는 역사상 최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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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대표의 부친과 모친은 모두 6.25전쟁참전용사다. 아버지를 회상하던 최 대표는 특히 "어머니는 굉장히 강인한 여성이다. 모진 고생을 했어도 당당했던 분"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사진제공=최성룡 대표

 

연좌제로 외면한 국가 대신 납북자 구출에 뛰어든 삶

- 부모님이 대단한 분들이셨군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은 동네 출신입니다. 평안북도 정주에요. 정주는 유명한 반공 도시입니다. 정말로 강인한 분들이셨어요. 저는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고 정치할 사람도 아닙니다. 이 일을 하는 건 오로지 이 문제를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알리고 정치권 각성도 촉구하고 인식을 바꿔줘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동안 한 사람 한 사람 구출하면서 그때마다 내 아버지를 구출한다는 느낌으로 해왔어요.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이 저를 초대해서 만나고 그다음 김건희 여사가 저를 포함해 납북자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이번 일을 통해 우리 정부의 태도에도 변화가 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제가 1952년생입니다. 이 활동을 언제까지 할지 몰라도 어머니가 아버지 유골을 꼭 찾으라고 당부하신 것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할 생각이에요.”

- 납북자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제작된다면서요.

“하하. 소식이 벌써 알려졌나요? 미국 영화사에서 6년 정도 촬영을 했어요. 내가 가진 자료가 많은데, 도움을 줬지요. 내년에 넷플릭스에서 방영된다고 하던데...이 일을 계기로 내가 마무리를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더라고. 바람이 있다면 이 영화에 내가 아버지 유해를 거둬들이는 장면까지 실렸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 소망이 이뤄질 수 있을지...”

동아일보 6월 20일자 보도에 따르면 해외에서 처음으로 납북자 문제가 다큐멘터리로 제작된다.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 스콧 크리스토퍼슨 브리검영대 교수는 16일(현지 시간) 이 매체와 인터뷰에서 “올해 안에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 겸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을 주인공으로 한 6부작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크리스토퍼슨 감독은 “뉴욕타임스(NYT)에서 최 대표에 대한 기사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납북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함께 6·25전쟁에서 싸웠던 참전용사가 납북되고 그 아들이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 북한 억류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송환시키고 있다는 얘기가 강렬하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2018년부터 최 대표를 촬영했다는 크리스토퍼슨 감독은 “최 씨가 북한에서 총살됐다는 얘기가 전해지지만 최 대표는 한사코 ‘아버지 생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한다”며 “그는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한국에 데려올 때마다 아버지를 모시는 것 같다고 했다. 그건 카타르시스적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퍼슨 감독은 “48세에 납북자 송환 활동을 시작한 최 대표가 이제 71세”라며 “하지만 그동안 한국 정부는 납북자 구출을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또 “일본이 납북자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고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도 납북자 문제 같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이는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라고 했다.

그는 “넷플릭스 HBO 등이 다큐 시리즈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조만간 (방영)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며 “이 다큐멘터리로 납북자 문제가 다시 조명 받고 변화를 끌어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최 대표는 "우리나라의 자국민 보호의지가 아프리카 수준보다 못하다"며 작심 토로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납북자와 국군포로에 대한 의지를 끝까지 버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또 정치권과 국민에게도 따뜻한 관심과 응원을 당부했다.
최 대표는 "우리나라의 자국민 보호의지가 아프리카 수준보다 못하다"며 작심 토로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납북자와 국군포로에 대한 의지를 끝까지 버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또 정치권과 국민에게도 따뜻한 관심과 응원을 당부했다.

- 정치권과 국민에 하고 싶은 말씀이 여전히 많으실 듯 합니다.

“심한 말 같지만 우리나라의 자국민 보호 의식은 아프리카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문제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하고 도와줄 건 도와주는 식으로 해야지 무조건 한 쪽 방향으로 끌고 가선 안 된다고 봐요. 납북자 문제도 우리가 요구하는 건 생사 확인이라도 해달라는 거예요. 언제 돌아가셨다고 날짜라도 확인해주면 제사라도 지내자는 것인데 북한은 완전히 무시하잖아요. 북한이 저런 태도를 바꾸지 않는 것은 우리 정부 탓이 큽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언론도 책임이 큽니다. 그동안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어요. 이런 문제들을 자꾸 지적하고 바로잡아줘야 후세대도 똑바로 알고 눈을 뜨지 않겠어요? 납북자 가족들 참 외롭습니다. 일선 활동에서 은퇴하기 전에 이 문제와 관련된 법안이 개정될 수 있도록 힘쓰고 그동안 고통당한 가족들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겁니다. 정부도 유가족들에게 도움을 줬으면 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가장이, 아들이 북으로 납치되어 그 가정이 풍비박산이 난 것 아닙니까. 제대로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NGO저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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