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in] 현대차 노사, '교토삼굴(狡兔三窟)' 지혜 모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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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in] 현대차 노사, '교토삼굴(狡兔三窟)' 지혜 모을 때
  • 노경민 기자
  • 승인 2023.09.2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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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 이래 첫 '5년 연속 무분규' 임단협 타결
임금 실질 인상률 12% 수준 역대 최고 수준
노사 합의 무분규 합의 불구 여론 반응 냉소적
"퍼준 만큼 신차 판매가 올릴 것" 비판 목소리
'노조 달래기' 역효과... 노조의 태도 변화 절실
현대차 노사 대표가 지난 20일 울산공장 동행룸에서 열린 2023년 임단협 조인식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현대차 노사 대표가 지난 20일 울산공장 동행룸에서 열린 2023년 임단협 조인식에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齊)나라에 살던 풍훤은 본래 거지였다. 전국시대 4공자로 이름을 떨친 맹상군을 찾아가 '식객'으로 받아주기를 청했다. 맹상군은 풍훤의 몰골이 남루해 특별한 재주는 없을 것이라 여겼지만 청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3등 숙소에 머물던 풍훤은 칼을 두드리면서 "고기 찬이 없다"고 노래했다. 맹상군이 그를 2등 숙소에 머물도록 해주자 이번에는 "타고 다닐 수래가 없다"고 노래했다. 다시 그를 1등 숙소에 마물도록 했으나 "노모를 먹여 살릴 것이 없다"며 더 많은 요구를 했다. 맹상군이 이를 다 들어주고 나서야 풍원은 노래를 멈췄다. 

'수레와 고기에 대한 탄식'이란 뜻의 거어지탄(車魚之歎)은 이런 서사를 배경으로 한 고사성어이다. '현재의 분수나 처지에 만족할 줄 모르고 한없이 욕심 부리는 행태나 그런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곤 한다.

이달 12일 현대차 노사는 파업 직전 가까스로 '2023년 임금 및 단체협약(이하 임단협) 잠정합의안'을 마련했다. 파국을 면한 현대차 노사는 "창사 이래 첫 5년 연속 무분규로 임단협을 마무리했다"며 서로를 추켜세웠다.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현대차 노조가 받게 될 역대급 처우에 놀라움과 부러움을 나타냈다. 현대차 노조는 '정년 연장 보장'을 앞세워 협상에서 사실상 완승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경영진은 노조에 휘둘려 돈보따리를 안겨주며 뭇매를 맞는 분위기이다. 

반론도 있다. '정년 연장 보장'이란 요구를 비켜감으로써 회사가 장래에 얻을 이익을 생각한다면 경영진의 혜안을 칭찬할지언정 퍼줬다고 손가락질할 이유는 없다는 것. 

억지를 써 안락한 생활을 누린 풍훤은 맹상군이 정치적 실각의 위기에 직면했을때 그를 구한 은인으로, 그 유명한 '교토삼굴(狡兎三窟)'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혜로운 토끼는 위기를 벗어날 세 개의 피신처를 만든다'는 뜻을 지닌 교토삼굴은 기업 경영 리스크 해법을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임단협 내용에 대한 찬반은 별론으로 하고 분명한 것은 현대차 노사 모두 엄청난 책무를 짊어지게 됐다는 사실이다. 임단협의 에필로그가 '거어지탄'이 될지, '교토삼굴'이 될지는 이제부터 전적으로 노사 양측의 행보에 달려있다. 그 결과가 교토삼굴이 되기 위해선 노사 모두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노조의 유연한 태도 변화가 절실하다. 우리나라처럼 노조에 유리한 파업조건을 법제화한 국가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한때 '강성 노조의 천국'이었던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는 외국 자본 이탈로 자국 산업 경쟁력이 급락하자, 노조에 기울어진 경직된 노사관계를 대폭 손질해 노사간 '무기 균형'을 이뤘다. 그 결과 이들 국가는 뒤처진 산업 경쟁력을 상당 부분 회복했다.

우리가 스웨덴의 사례를 밟지 않으려면 노조 스스로 '균형'을 찾기 위한 전향적 태도를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걸핏하면 파업을 앞세워 경영진을 압박하는 투쟁일변도 행태는 원점에서 숙고할 떄가 됐다. 경영진 역시 해마다 되풀이 되는 '노조 달래기' 관행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외면해선 안된다. 삼성의 준법감시위처럼 외부 명망가로 구성된 독립된 제3의 준법감시기구를 설치, 경영 투명성을 확보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조언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기본급 11만1000원↑, 성과금 400%+1050만원... '돈잔치' 

현대차 노사는 12일 울산공장 본관에서 열린 23차 교섭을 통해 역대 최고 수준의 기본급 인상 및 성과금 지급에 합의했다.

기본급 11만1000원 인상(호봉승급분 포함), 성과급 400%+일시금 1050만원 지급, 재래시장 상품권 25만원과 현대자동차 주식 15주 제공, 하계휴가비 30만원에서 80만원으로 50만원 인상, 2교대 복지포인트 50만점 추가 제공 등이 주된 내용이다. 주거지원금 대상 및 금액도 대폭 상향돼 대출규모는 총 370억원에서 600억원으로, 주택 임차지원금은 5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2배 확대됐다.

최대 현안 중 하나인 '해고자 복직'에 있어서도 사측은 노조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현 노조 집행부 임기 말인 올해 12월까지 해고자 복직을 확약한 것. 

앞서 노조는 올해 임단협에서 기본급 18만4900원 인상(호봉승급분 제외), 전년도 순이익의 30%(주식 포함) 성과급과 상여금 900% 지급 등을 요구했다. 

합의안을 보면 노조는 실현 가능한 최대치의 조정안을 사측으로부터 이끌어냈다고 할 수 있다. 회사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상반기에도 호실적을 내면서 사측에 '여력'이 있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파업요건을 완화한 현행 노동법제가 노조에 동력을 제공한 측면이 크다. 

최근 호실적 역시 객관적 잣대로 본다면 '여력'이라고 할 수도 없다. 현대차그룹의 공시자료는 업계를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분석 금기' 대상이다.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는 유무형의 지원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회사 자체의 현금 흐름만 놓고보면, '여력'은 커녕 눈앞에 닥친 설비투자도 버거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JD파워를 비롯한 글로벌 공인기관의 품질평가에도 불구하고 현대차 모델에 대한 자동차 매니아들의 평판은 여전히 냉소적이다. 이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수시로 현대차 모델의 신차 품질에 실망감을 표현하는 게시글이 올라오고 있다. 불특정 다수의 자동차 매니아들이 지속적으로 현대차 신차 품질의 안정성에 불만을 제기한는 상황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품질 관리에 빈틈이 있다는 유력한 방증일 수도 있다.  

 

"노조, 매번 공장 멈추겠다 압박하며 원하는 것 얻어내" 

현대차 노사 간 합의를 바라보는 업계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업계 관계자 A는 "현대차 노조는 무리한 요구라는 걸 알면서도 협상 테이블에서 먼저 가장 쎈 카드를 꺼낸다. 이후 차선책으로 요구사항을 최대한 뽑아내는걸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매번 공장 멈추겠다는 협박으로 원하는 걸 얻어내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비꼬았다.

A는 "근로자가 일을 잘하고 제품 품질이 좋아져야 임금을 올려주는게 당연한건데, 과연 현대차가 그럴 상황인지 의문"이라며 "임금만 올리면 소비자들은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 차를 비싼 돈 내고 사야 하는 셈"이라고 부연했다.

또 다른 관계자 B는 "현대차 노사는 자신들이 아니면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이 멈추는 것으로 알고 자만하고 있다. 이것이 근본적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이런 노조 먹여살리기식 협상이 계열사들을 다 죽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과 교수는 "연봉은 한 번 정하면 낮아지기 어려운데, 현대차는 매년 억대 연봉 잔치를 벌이고 있다"면서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면 양쪽이 같이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사측은 노조가 파업을 한다 하더라도 아닌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며 "현대의 사례는 어느 한 쪽의 잘못이 아니다. 양측이 모두 반성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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