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SH "기준 없으니 행복주택 재청약 허용"... 이런 게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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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SH "기준 없으니 행복주택 재청약 허용"... 이런 게 혁신
  • 정규호 기자
  • 승인 2022.06.2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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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주택 재청약 제한’ 폐지 두고 상반된 해석
LH공사 "명시적 내용 없어 2년 이상일때 허용"
SH공사 "제도 완비 때까지 재청약(이주) 허용”
공기업서 보기 힘든 네거티브 규제... "공무원·공기업에 좋은 사례 될 것"

행정규제기본법엔 ‘규제영향분석’이란 내용이 있다. 규제로 경제, 사회 등 국민 삶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규제를 판단하는 것이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규제 동향 리포트에 따르면 올해 1분기에만 73건의 규제가 신설·강화됐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국회의원발 규제 법안은 3950건으로 이전 정부 대비 약 200.8% 증가했다.

규제가 늘어난 원인은 다양하다. 공공기관의 '포지티브 규제'도 대표적 원인 중 하나다. 포지티브 규제는 '금지를 원칙으로 하되,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사안을 열거하는 방식'을 말한다. 즉 법률이 허용하는 사안을 제한적으로 열거하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경우를 금지하는 경우이다. 네거티브 규제는 '허용을 원칙으로 하되 금지 또는 제한하는 행위를 법률이 열거하고 있는 경우'이다. 

포지티브 규제는 금지 내지 제한의 범위가 광범위한 반면, 네거티브 규제는 금지 내지 제한의 범위가 한정적이다. 법률 수명자(受命者)인 일반 국민 입장에서 본다면 네거티브 규제가 한결 유리하다.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선 과감한 규제 혁파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는 점에서, 네거티브 규제가 포지티브 규제에 비해 한결 부담이 적다. 

국민을 대상으로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무원이나 공기업·공공기관 임직원은 '업무 편의'라는 유혹에 흔들릴 때가 적지 않다. 이럴 때 행정관청이나 공기업 또는 공공기관은 광범위한 금지를 수반하는 포지티브 규제 방식을 선택하곤 한다. 허용되는 사안을 제한적으로 열거하면, 그만큼 업무를 수행하는데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포지티브 규제의 증가는 국민 권익을 부당하게 침해할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공공서비스의 질적 개선과 국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라도 네거티브 규제의 확산이 요구된다. 

최근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동시에 추진 중인 국민행복주택 재청약 기준을 놓고 LH와 SH의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이 주목을 받았다. 국민행복주택은 공공임대주택 모델 중 하나로 무주택 서민의 주거 복지를 목적으로 도입됐다. 

김헌동 SH공사 사장

국민행복주택의 거주기간은 청년 6년, 신혼부부 10년으로 정해져 있으며,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도록 설계돼 있다. 이 제도는 시세보다 한결 저렴한 금액으로 장기간 거주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도가 높다. 다만 행복주택 거주자가 다른 지역 행복주택으로 거주지를 옮길 수 없다는 점은 단점으로 지적됐다. 이직 등의 이유로 거주지를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도 다른 지역 행복주택으로의 이사가 원칙적으로 금지돼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국토교통부는 현장 의견을 수렴해 지난해 말 관계법령을 개정, 행복주택 거주자의 이사(재청약)를 허용했다. 행복주택 거주자가 다른 지역 행복주택으로 이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제도 개선을 환영하는 게시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얼마가지 않아 급변했다. 행복주택 공급 주체간 서로 다른 법령 해석으로 혼란이 초래됐다. LH는 행복주택 잔여거주기간이 만 2년 미만인 거주자의 이사(재청약)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행복주택 거주자의 이사(재정약)는 잔여거주기간이 2년 이상 남은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는 것이 LH 판단이었다.

LH 관계자는 "법령상 잔여거주기간 2년 미만인 자의 재청약을 허용한다는 명시적 내용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행복주택 재청약 허용'을 예외적 인정 사유로 해석한 결과이다. 

같은 제도를 시행 중인 SH는 LH와 상반된 해석을 내놨다. SH는 잔여거주기간 2년 미만인 경우에도 재청약을 받아주는 쪽으로 내부 의견을 모았다. 법령상 '잔여거주기간 2년'을 재청약 여부 판단 기준으로 삼을만한 근거가 없으므로, 행복주택 거주자에게 가급적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입법 취지에 부합한다고 SH 관계자는 부연했다. 

이같은 혼란의 원인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주무부서인 국토교통부가 법령을 개정하면서 행복주택 재정약 허용 여부와 관련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은 점을 꼽을 수 있다. '입법의 불비(不備)'가 제도에 대한 국민 불신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두 번째는 법령 해석을 둘러싼 공공기관의 태도 차이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LH와 SH는 해당 법령 해석에 있어 전혀 다른 시각차를 나타냈다. LH는 포지티브 규제, SH는 네거티브 규제 측면에서 사안을 조명했다. 법령 해석의 차이가 빚은 혼란은 행복주택 거주자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번 사례를 계기로 국토부는 행복주택 재청약 세부 항목 마련에 착수했다. 추가적인 법령 손질은 행복주택 거주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SH의 전향적 법령 해석은 특유의 폐쇄적 행태로 지탄을 받아온 공직사회에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SH의 네거티브 규제로 청년·신혼부부 행복주택 입주민 상당수가 새로 바뀐 제도의 혜택을 온전히 받을 수 있게 됐다. LH와 경기도시공사 등도 이번 일을 거울 삼아 국민 권익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열린 행정을 강화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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