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간 삼성 시총 400배 키운 승부사... 한국경제 큰 별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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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간 삼성 시총 400배 키운 승부사... 한국경제 큰 별 지다
  • 유경표, 최유진 기자
  • 승인 2020.10.25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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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 삼성 초일류 반열 올리고 영면
향년 78세... 조용한 성격에 럭비 즐긴 '승부사'
93년 독일서 역사에 길이 남을 '신경영 선언'
'라인 스톱제' 등 혁신정책 실행... 그룹 체질 개선
재임 27년, 시총 396배 성장... 세계 1위 제품 19개
한국 사회 전반에 '혁신'의 가치 일깨워
故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하는 모습. 사진=삼성전자
故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하는 모습. 사진=삼성전자

2014년 5월부터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6년 동안 와병 중이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결국 타계했다. 남다른 안목과 혜안으로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의 반열에 올린 고인은 한국 경제에 지울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기며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다. 

이 회장은 특유의 조용한 성격으로 ‘은둔의 경영자’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과 문제를 정면 돌파하는 승부사적 기질을 동시에 갖췄던 타고난 리더라는 평가를 받는다.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의 3남으로 태어난 이 회장은 경남 의령군에 있던 할머니의 손에서 3살까지 자랐다. 6.25전쟁이 발발하며 우여곡절 끝에 부산사범초등학교를 다니게 된 그는, ‘선진국을 배워야 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5학년이던 1953년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 1학년까지 마쳤다. 

이후 다시 한국으로 귀국한 이 회장은 서울대사대부속중·고교를 졸업하고 1961년 일본 와세다대 유학길에 오른다. 1966년 9월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한다. 

이 회장은 말수가 적고 사색을 즐기는 성격이었지만, ‘스포츠맨’이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레슬링부에 몸담았던 이 회장은 일본 유학 시절 럭비선수로 활동했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은 이때 길러졌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럭비는 걷기조차 힘든 진흙탕에서도 온몸으로 부딪치고 뛴다. 오직 전진이라는 팀의 목표를 향해 격렬한 태클과 공격을 반복하면서 하나로 뭉친다”며 ‘럭비정신’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왼쪽)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년시절 모습. 사진=삼성
이병철 삼성 창업주(왼쪽)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년시절 모습. 사진=삼성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초일류' 기반 닦은 신경영 선언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MBA 과정을 마친 이 회장은 한국으로 돌아와 중앙일보 산하 동양방송 이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삼성 비서실과 삼성물산, 삼성그룹 부회장 등을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그는 이병철 창업주 별세 직후인 1987년 12월,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랐다. 취임사에서 이 회장은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며 “첨단 기술산업 분야를 더욱 넓히고, 해외사업 활성화로 그룹의 국제화를 가속 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일류의 길은 쉽지 않았다. 취임 5년 뒤인 1993년 2월, 이 회장은 임원들을 대동하고 해외시장 순방에 나섰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대형가전 유통업제 베스트바이를 방문한 이 회장은 그곳에서 먼지 쌓인 채 구석에 박혀있는 삼성TV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 사내 방송국이 제작한 비디오테이프는 그에게 위기의식을 불어넣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비디오테이프에는 삼성전자 세탁기 생산라인의 불량품 제조 현장이 생생하게 담겨있었다. 영상 속에서 한 직원은 세탁기 뚜껑과 몸체가 맞지 않자 칼로 뚜껑 테두리를 아무렇지 않게 잘라내 조립했다.

일련의 사건을 겪은 이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로 그룹 계열사 사장단을 모두 불러모았다. 삼성의 초일류를 이끈 ‘프랑크푸트트 선언’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이 자리에서 한국 경제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겼다.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라며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선언 직후 삼성은 재계를 깜짝 놀라게 할 혁신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건희식 품질경영의 상징이 된 '라인 스톱제'가 대표적이다. '라인 스톱제'는 불량품이 나오면 해당 제품이 생산된 라인 전체를 중단하는 것이다. 1995년 3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는 불량 무선전화기 15만대를, 사업부 전 임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에 태웠다. 삼성 갤럭시 스마트폰의 기틀이 된 '애니콜 신화'는 이렇게 태어났다. 

▲문제가 생기면 5번 정도 이유를 따져보라는 '5WHY' 사고 ▲디자인과 경영은 별개가 아니라는 '디자인경영론' ▲인재등용에 있어 학력 성별 제한을 없앤 '열린 채용'제 ▲오전 7시에 출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하는 '7·4제' 등 혁신적 정책이 잇따라 시행됐다. 

그룹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혁신 프로그램이 시행되면서 이 회장 취임 당시 매출은 10조원에서 2018년 387조원으로 약 39배, 영업이익은 2000억원에서 같은 기간 72조원으로 무려 359배 급증했다. 기업의 시장가치를 보여주는 시가총액은 1989년 1조원에서 2018년 396조원으로 396배 증가했다. 이 회장의 재임 시기 스마트폰·반도체·TV 등 세계 1위에 오른 제품은 19개에 달한다. 

이 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이오와 의료기기, 자동차용 전지 등 미래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신사업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사진=삼성전자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사진=삼성전자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 제도, 관행 다 버려라"

인재를 중시하는 삼성의 기업 문화도 이 기간 동안 확고히 정착됐다. 이 회장이 2003년 인터뷰에서 “1명의 천재가 10만명, 20만명을 먹여살린다”고 언급한 일화는 유명하다.  

200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선포한 '디자인 선언'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롯됐다. 이 회장은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을 1.5류라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는 "제품이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라며 "짧은 순간에 고객을 사로잡지 못하면 경쟁기업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했다.

이 회장은 “앞으로는 세상에서 디자인이 제일 중요해진다. 개성화로 간다”면서 “성능과 질, 생산기술이 비슷해 질 것이므로 앞으로는 개성을 어떻게 하느냐, 디자인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해 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회장은 쓰러지기 전인 2014년 1월 신년사에서 “5년 전, 10년 전의 비즈니스 모델과 전략, 하드웨어적인 프로세스와 문화는 과감하게 버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과 제도, 관행을 떨쳐내자”며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성 속에서 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핵심 사업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한편, 산업과 기술의 융합화·복합화에 눈을 돌려 신사업을 개척해야 한다”며 “지난 20년간 양에서 질로 대전환을 이루었듯이 이제부터는 질을 넘어 제품과 서비스, 사업의 품격과 가치를 높여 나가자”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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