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준법감시위 고찰(考察)... '회복적 사법' 왜 화두인가?
상태바
삼성준법감시위 고찰(考察)... '회복적 사법' 왜 화두인가?
  • 양원석 기자
  • 승인 2020.01.15 07: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용 파기심 법정 권고 '준법감시기구'에 담긴 함의 분석
한계 드러난 '응보(應報)적 사법'... 법조계 인식의 숨은 단면
"준법감시委, 경제계 활력 불어넣는 화해 채널로 작동" 기대감
김지형 삼성준법감시위원장 내정자(전 대법관). 사진=이기륭 기자.
김지형 삼성준법감시위원장 내정자(전 대법관). 사진=이기륭 기자.

“삼성이 문을 열었다는 사실 자체가 변화를 향한 긍정적 신호라고 여겼다. 진위에 대해 많은 의구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삼성이 풀어야 할 과제이며, 동시에 우리 위원회의 몫이기도 하다.”

-삼성준법감시위원장 내정자, 김지형 전 대법관.

9일 오전 서울 서대문 법무법인 지평 회의실에서 열린 김지형(사법연수원 11기) 전 대법관 기자간담회 화두는 ‘회복적(치유적) 정의’였다.

이날 기자간담회는 삼성(그룹)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된 김 전 대법관이 입장을 발표하고, 기자들의 질의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뇌물 등 혐의 사건 파기환송심 재판을 맡은 정준영(연수원 20기)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법정 권고’를 계기로 출범했다.

정 부장판사는 지난해 10월 25일 파기심 공판 첫 기일 심리를 마무리하면서 피고석에 앉은 이 부회장을 상대로 몇 가지 권고를 했다. 특히 그는 “하급기관 뿐만 아니라 고위직 임원과 기업 총수의 비리행위도 방지할 수 있는 강력한 준법감시제도가 작동돼야 한다”며 실효적 준법감시제도 구축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연방대법원 양형기준 제8장 준법감시제도를 참고하라”고 덧붙였다.

1991년 제정된 미 연방대법원 양형기준 제8장은 [기업 구성원을 피고로 하는 형사 공판에 있어서, 당해 기업이 엄격한 준법감시제도를 도입해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는지 여부를 살펴 감형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정 부장판사는 ‘국가 경제가 혁신형 모델로 나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총수 역할론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권고는 ‘재벌체제 폐해를 시정하고 혁신하기 위해서는 총수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데 방점이 찍혔다.

정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6일 열린 양형 심리 기일(3차 공판)에서, 자신이 내준 과제에 대한 답변서 제출을 요구했다.

그는 “앞으로 정치권력자로부터 이 사건 기초사실과 동일한 요구를 받게 되는 경우 다시 뇌물을 공여할 것인지, 그런 요구를 기업이 거절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음 공판 기일 전까지 답변을 제시해 달라”고 말했다.

◆‘회복적 사법’... 범죄 원인 규명 및 재발방지책 마련 중시

정준영 서울고법 부장판사. 사진=EBS 화면 캡처.
정준영 서울고법 부장판사. 사진=EBS 화면 캡처.

첫 공판기일에서 나온 그의 법정 권고는 재판장의 피고인에 대한 조언이라고 하기엔 그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고, 훈계라고하기엔 이 사건 공소사실 혹은 기초사실관계와 연결성이 부족했다. 이례적인 정 부장판사의 법정 권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적지 않은 언론이 그의 권고를 이 부회장의 양형과 연결지어 바라보는 시각을 드러냈으나, 명확한 근거를 제시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가장 설득력 있는 추론은 ‘회복적 사법’을 중시하는 정 부장판사의 판결 성향에 터 잡은 해석이다.

‘응보(應報)적 사법’의 한계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회복적 사법’은 현대 형사정책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가해자에 대한 보복 및 사회와의 격리에 초점을 맞춘 응보적 사법은 범죄인의 재사회화와 사회 복귀, 동종 또는 유사범죄 예방, 피해의 본질적 회복이란 측면에서 뚜렷한 한계를 드러냈다.

회복적 사법(회복적 정의 내지 치유적 정의)은 기해자와 피해자, 지역사회가 함께 ‘3각 협의체’를 구성해 범죄 발생의 원인을 규명하고, 유사 사례가 재현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

◆양형 판단 시 ‘회복적 사법’ 고려하는 사례 늘어

법정을 취재하다 보면 형사 사건을 심리하는 법관들이 “...(전략) 이상과 같은 이유로 피고인이 사회에 복귀해 건강한 사회 일원으로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주고자 합니다”라는 판시이유와 함께, 형의 집행을 유예하는 경우를 종종 접할 수 있다. ‘회복적 사법’ 이념이 우리 법원에 폭넓게 퍼져 있음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이 경우 법관이 구체적 판시이유로 꼽는 것은 △피고인이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 △범행 가담 정도 △범행이 피해자 혹은 사회에 끼친 해악의 정도 △피해 회복 여부 및 이를 위한 피고인의 진지한 노력과 반성 등이다.

◆김지형 전 대법관 “재판장, 삼성 측에 자율적 준법감시기구 설치 주문”

정 부장판사 역시 회복적 사법을 중시하는 법관 중 한 명이라는 데 이견을 내는 관계자는 많지 않다. 회복적 사법에 대한 그의 신념을 기준으로 할 때, 정 부장판사의 당부는 [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엄격한 준법감시체계를 만들어 과거의 구태와 단절하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삼성준법감시기구 출범의 계기가 법정 권고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은 김지형 전 대법관도 인정했다.

김 전 대법관은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설치의 직접 계기는 이재용 부회장 형사 공판 재판장의 권고로부터 시작됐다”며 “재판장은 미 연방대법원 양형기준 제8장이 정한 기업의 자율적 준법감시기구 마련을 삼성 측에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고 부연했다.

그는 “저희 생각과 재판장 생각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밝혀, 이 부회장 사건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이 정준영 부장판사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김 전 대법관 “회복적·치유적 정의 실현하려면 ‘화해’가 먼저”

김 전 대법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상당히 긴 시간을 할애해 자신이 위원장직을 수락한 과정과 고민, 결단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꼽는다면 ‘회복적·치유적 정의’에 대한 그의 발언이었다.

다음은 김지형 전 대법관의 이날 발언 중 일부다.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출범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우호적인 시각도 냉소적인 시각도 있다. 위원회 역할을 지지하지만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일리 있다. 제 좁은 소견으로는 삼성과 최고경영진은 구별해서 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기업으로서 삼성의 성공을 바라지, 실패를 바라진 않는다. 
적대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은 대부분 삼성 아닌, 최고경영진을 향하고 있다.  

최고경영진이 변해야 삼성이 변하고 기업 전반이 변하고 세상이 변한다.  
삼성은 기업가정신을 올바르게 발휘해서 위대한 글로벌기업으로 더 뻗어 나가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법 위반 리스크를 철저히 관리해 나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회복적·치유적 정의’를 말한다. 
이를 위해선 화해가 선행돼야 한다.”

김 전 대법관 발언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①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화해’→②‘회복적·치유적 정의’ 실현→③방법론으로서 독립성이 보장된 준법감시위원회 설립·운영→④기업의 법 위반 리스크에 대한 철저한 감독.

이렇게 볼 때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존재 의미는 ‘회복적·치유적 정의의 실천’이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 ‘화해’는 우리 기업이 과거의 구태와 단절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준법감시위, 가로막힌 벽 부수는 소통·화해의 채널 될 것”

김 전 대법관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역할을 강조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기업지배구조 개선 활동에 천착한 시민사회 원로, 학계, 법조계, 언론계 전문가들을 위원으로 삼은 사실은 그의 기본 인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 전 대법관은 삼성에 대해서도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는 삼성을 향해 “적대적 냉소적 시각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통렬한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한다. 비록 억울한 점이 있어도 받아들이는 것이 자성의 출발임을 권한다”고 했다.

삼성의 변화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이들을 염두에 둔 듯한 발언도 나왔다.

“삼성은 여러 경로로 최고경영진의 진의를 표하고 있다. 저도 믿고 있지만 완전한 확증을 갖고 있진 않다. 신뢰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만들고 쌓아 나가야 한다. 난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완전하진 않겠지만 완전을 추구해 나갈 것임을 분명히 약속 드린다.”

그는 ‘회복적 정의’를 바탕으로 한 삼성준법감시위 활동이, 우리 사회와 경제계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의 물결을 일으킬 것이란 기대도 나타냈다.

“삼성의 변화는 기업 전반으로 이어질 것이다. (삼성준법감시위가) 가로막힌 벽을 부수고, 서로 소통하고 화해하는 채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부회장 사건 파기심 재판장과 삼성준법감시위원장직을 수락한 김 전 대법관이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목소리로 ‘회복적 사법’ 혹은 ‘회복적 정의’의 실현을 강조하고 나섰다는 점은 이 사건에 대한 법조계 인식의 숨은 단면을 보여준다. 


관련기사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