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25시] "相生" 외치며 출혈경쟁 조장... 원청 갑질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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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25시] "相生" 외치며 출혈경쟁 조장... 원청 갑질 실태
  • 오창균 기자
  • 승인 2018.08.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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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적 주종적 수직 구조에 점점 말라가는 하청업체
"20대 그룹의 하도급 단가인하, 절실하게 개선 돼야"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상춘재에서 대기업 오너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시장경제 DB

경제사회의 고질적 병폐(病弊)로 꼽히는 대기업 갑질 논란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갑(甲)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겨가면서, 을(乙)에게는 부당한 거래를 강요하는 불평등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청업체를 대하는 대기업들의 일반적인 행태를 보면 갑질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대략적인 윤곽을 가늠할 수 있다.

#. 대기업에는 없는 '공정거래' 

<시장경제>가 입수한 정부 문건에 따르면 상당수 대기업들은 최저가 낙찰제를 통해 하청업체 간 출혈경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다시 하위 하도급업체, 자재납품업체, 일용노동자 사이의 연쇄적인 출혈경쟁을 야기시키게 된다. 거시적으로는 대기업의 제품구매력 저하로 이어져 경제의 저성장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대기업들은 하청업체들이 2회 이상 반복해 경쟁입찰에 참여하는 프레임을 구축한다. 이는 곧 과당(過當) 저가경쟁 유도를 의미한다. 사실상 입찰의 의미를 상실한 셈이다. 대기업의 전자입찰제도는 최저가이면서 예정 가격(Predetermined Amount)이 이익을 볼 수 없는 형태로 진행된다. 결과적으로 실질적 공정거래는 찾아볼 수 없다. '상생의 정신'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관계 당국 관계자는 "20대 그룹의 하도급업체 단가인하 문제는 다른 어느 곳보다 절실하게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에서 아무리 상생협력을 강조한다 해도 대기업은 난공불락이고 단가인하는 여러 가지 무형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 상생(相生) 아닌 상사(相死)의 길

부담은 을(乙)의 몫이다. 제조업계는 대부분 하청업체들이 원자재를 구매해 가공하고 원청업체에 납품하는 구조를 띄고 있다. 원자재 가격이 갑작스럽게 오르게 되면 하청업체들은 잔뜩 울상을 짓는다. 원청업체인 대기업은 강 건너 불 구경이다.

하청업체 역시 기업이다. 부가가치가 발생해야 재투자가 가능하고 이는 다시 시설합리화, 품질향상, 원가절감으로 이어진다. 제조업의 특성상 재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생명력이 끊겨 도태될 수밖에 없다. 정부 여당이 입만 열면 외치는 '상생·공생' 주장은 그저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다. 대기업 밑에서 일감을 얻어 연명하는 하도급업체들은 그날 그날을 견디기도 벅찬 실정이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은 허울에 그친다. 갑과 을의 제왕적이고 주종적인 관계는 날로 심화되고 있다. 을(乙)은 부당한 원가절감이 이뤄지더라도 대기업 노조의 권위에 위축돼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나아가 대기업은 협력사에게만 인원감축·내부자료 요구를 하며 상생(相生)이 아닌 상사(相死)의 길을 걷게 하고 있다.

#. 품질개선은 커녕 폐업 걱정 

당장 뜯어고쳐야 할 나쁜 관행이 넘쳐난다.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이를 문제 삼았을 때 피해를 받을까 두려워 속앓이를 하는 하청업체들이 많다. 굳은 결심을 하고 공정위에 사실을 알려도 시정이 되지 않는다. 대기업과 공정위가 커튼 뒤에서 은밀한 거래를 하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김상조 위원장이 취임한 후에도 별반 바뀐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청업체들은 불공정거래를 당해도 고발을 포기하고 팍팍하게 지내는 상황이다. 

대기업들은 사전통보 없이 거래를 중단하거나 거래선을 변경하는 경우가 많다. 부당한 처우에 견디다 못한 하청업체가 단가인상을 요청하면 거래선을 중국이나 동남아로 돌려버리기 때문에 중소업체들은 고사(枯死) 상태다. 이 때문에 품질개선은 커녕 폐업을 생각하는 하청업체가 많다. 구두로 납품준비를 시키고 경우에 따라 발주서를 주지 않아 하청업체 창고에는 악성재고가 쌓인다. 모델 변경이나 기종 변경 시 연간손실비용이 연매출의 10%까지 치솟는 경우가 허다하다.

#. 업종 가릴 것 없이 곳곳에서 갑질

IT·전자 업종의 경우 대기업은 분기별 혹은 월별로 하청업체에 단가인하 압박을 하니 2~3차 벤더들의 고통이 심화된다. 반도체를 다루는 모 대기업의 직원들은 연례행사처럼 하청업체를 닦달한다. 작년 대비 많이 깎으면 깎을수록 자신의 인센티브와 연봉이 오르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1차 벤더를 상대로 설비가격을 10~30% 인하하면 2차 벤더는 상대적으로 그 이상 인하를 당하는 수직적 구조다. 영세업체는 남는 게 없다. 재투자는 꿈도 꿀 수 없다. 

대형통신사와 1차 하청을 받는 시스템 통합(SI) 업체의 상당수는 클레임이 발생할 경우 책임을 2차 협력업체에 떠넘기고 있다. 선금·중도금·잔금 지급 시 원청에서 수령을 했음에도 내부결제 문제를 이유로 최대한 지연시킨다. 정부가 산정한 용역 단가는 무용지물이다. 하청업체들은 법정단가의 50%에 일을 하기도 한다. 개발비를 추가해 주지 않고 기간을 연장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대기업 건설사는 한술 더 뜬다. 이들은 하청업체에 대한 잔금 지급 조건을 '납품 후 시운전 완료 시'로 규정해 세금계산서도 발행하지 못하게 묶는다. 또한 세금계산서 발행 자체를 하청업체가 아닌 원사업자로 돌리는 역발행 수법을 일삼는다. 하도급대금을 늦게 지급하기 위해 세금계산서 수령을 늦추거나 발행일자를 기록하지 않은 세금계산서를 요구하기도 한다. 1년이 넘도록 잔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대기업의 무한 최저가 입찰로 인해 전문건설업체는 줄도산 위기에 처해 있다. 대기업이 최저가에서 다시 추가로 인하하는 경우가 많아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공사를 하는 하청업체가 많다. 

#, "슈퍼갑 통제하는 방안부터 찾아야"

대기업 간의 거래에서도 갑질이 존재한다. '슈퍼갑'이라고 불리는 초대형 기업에 대한 문제다. 슈퍼갑은 상대 기업과 하도급거래를 하면서 부당한 단가인하를 요구하지만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대금 지급일과 방법을 마음대로 바꾸더라도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물론 불공정거래 관행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거래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

대기업들이 음성적으로 행하는 갖가지 단가인하 압력은 연쇄적으로 중소기업의 생존기반을 위협한다. 이에 전문가들은 "중소기업을 불이익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는 슈퍼갑의 횡포를 제도권 내에서 통제하는 방안부터 찾아야 한다"고 지적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하청업체들은 오늘도 깊은 한숨만 내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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