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34> 정선공주의 산후풍과 산후 우울증 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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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과 왕실의학] <34> 정선공주의 산후풍과 산후 우울증 처방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6.0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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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사진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젊은 나이에 병들고, 백약이 무효하여 세상을 떠났네. 길이 손발이 이지러짐을 생각하니, 심간(心肝)을 베어내는 아픔을 어이 이기리오. 부왕의 상례를 다하기도 전에 동생이 이승을 하직했네. 아, 이 서러움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어린 조카가 갑자기 믿고 의지할 곳도 잃었네. 슬픔을 머금고서 말을 엮어 사관을 보내 전(奠)을 드리노라. 슬프다. 살아서는 남매로서 항상 친애한 마음을 두터웠는데, 죽어 가니 유명의 길이 다르네.” <세종 6년 2월 2일>

세종이 숨진 여동생 정선공주를 기리며 쓴 제문이다. 정선공주는 세종 6년 1월 25일 이승을 하직했다. 나이는 불과 21세였다. 슬하에 1남 1녀가 있었다. 세종은 여동생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임금은 수라를 물리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했다.

정선공주는 조선왕실 역사의 굵직한 획을 그은 주인공이다. 자발적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역사의 한복판에 섰다. 한 번은 왕실의 간택 제도로, 또 한 번은 놀이에 빠진 남편의 무관심으로, 그리고 문화를 꽃피운 후손으로 인해 주목 받았다. 그녀의 손자는 남이 장군이고, 외손은 사임당 신씨와 율곡 이이로 이어진다.

공주는 세종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4남 4녀를 두었다. 왕자로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충녕대군), 성녕대군이 있다. 공주로는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가 있다. 이중 세종은 여섯 째였고, 정선공주는 일곱 째였다. 공주는 묘비명에 정숙하고 아름다우며, 예법을 실천한 현모양처로 묘사됐다. 

그녀는 남편을 조선 최초의 부마 간택제도에 의해 맞이했다. 아버지 태종은 막내딸의 편안한 시집생활을 원했다. 정치 풍파에서 벗어난 집에서 사위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4~5품 이하 사부(士夫) 가문의 아들’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그 결과 선택된 인물이 정승 남재의 손자인 남휘다. 태종은 남휘가 정승의 손자지만 아버지 없이 홀로 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점에 주목했다. 늙은 남재가 죽으면 그는 힘이 없기에 정변에 휘말리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또 교만하고 방종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공주의 결혼 생활은 불운했다. 남편을 놀이에 빼앗긴 것이다. 병이 깊이 든 상황에서도 남편의 간호를 받지 못했다. 쌍륙 놀이에 중독된 남편 남휘는 공주를 외면했다. 세종은 공주가 앓아눕자 사람을 수시로 보냈다. 그때마다 남휘는 공주의 병세도 살피지 않고 놀이에만 몰두했다. 분노한 세종은 남휘에게 도박과 놀이 금지령을 내렸다. 놀이를 하지 못하게 된 남휘는 더욱 엇박자로 나갔다. 공주의 병이 심각함에도 간호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여인을 본다. 그렇게 정선공주는 젊은 날에 남편의 무관심 속에 시름시름 앓다가 숨졌다.

정선공주는 산후병으로 추정된다. 정선공주는 15세에 초야를 치른 뒤 17세쯤에 첫 아이를 낳았다. 이 무렵에 어머니 원경왕후가 승하하고, 2년 후에는 아버지 태종도 승하했다. 공주는 출산과 함께 부모를 기리는 상례에 충실해야 했다. 먹을거리와 행동을 자제했다. 부모를 여윈 정신적 충격, 약해진 몸, 두 차례 출산은 산후 우울증의 호발 요건이다. 세종실록에는 공주가 ‘우연히 병을 얻었다’고 기록됐다. 이는 특별한 질병 보다는 정신과 몸의 쇠락으로 인해 시나브로 병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이 무기력한 상태인데 남편은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놀이에만 빠져 있었다. 공주는 더 우울할 수밖에 없다. ‘백약이 무효’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성에게 출산은 축복이다. 그러나 일부 여성은 요통, 부종 등과 함께 심각한 우울증을 겪는다. 270여 일의 임신은 육체적 에너지 고갈과 극심한 정신적 피로를 부른다. 출산 무렵에는 릴랙신(relaxin) 호르몬이 분비돼 골반이 확장되는 반면에 관절과 인대 조직이 느슨해진다. 출산 전후에는 관절이 약해지는 것이다. 또 출산 때의 다량 출혈, 출산 후 호르몬 변화, 육아 스트레스는 심리적 불안과 체력 약화를 가속화시킨다. 이 같은 요인이 겹쳐 산후 우울증이 나타난다. 출산 후 우울증은 2~3개월 후에는 대부분 사라진다. 하지만 일부는 호르몬 이상 등이 겹치며 증세가 더 악화된다.

한의학에서는 출산 후 관절약화, 피로감, 식은땀, 우울감, 부기, 통증, 소변불안, 구토, 오심, 변비, 수면장애, 상열감, 오한, 설사, 소화불량 등의 증상을 산후풍(産後風)으로 본다. 산후풍은 산후조리가 충실하지 못한 탓이다. 출산 전후 약화된 몸은 충분한 영양섭취, 몸의 어혈 제거, 관절 보호, 혈액순환 촉진 등의 적절한 산후 조리로 회복된다. 동의보감에서는 최소 100일의 휴식, 즉 산후조리를 권장한다. 그러나 분만 후 기혈이 손상된 상태에서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관절, 경락과 기육(肌肉)사이가 어혈(瘀血), 풍한의 사기로 막힐 수 있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몸에 통증이 발생한다. 

산후풍의 예방과 치료는 약침, 뜸, 탕약 등이 활용된다. 탕약은 혈허형(血虛型), 풍한형(風寒型), 신허형(腎虛型), 혈어형(血瘀型) 등의 유형에 따라 처방이 달라진다. 공통적으로 기력과 혈을 보하고, 어혈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또 증상에 따라 소염약재가 더해진다. 많이 처방되는 탕약은 생화탕, 보궁탕, 오적산, 보중익기탕, 보허탕 등이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로 대한황실문화원 황실의학 전문위원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몸을 보(保)하고, 체중을 감(減)한다’는 한의관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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