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 죽음 앞에 선 소크라테스 "누가 옳은지는 神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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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 죽음 앞에 선 소크라테스 "누가 옳은지는 神만 안다"
  • 박규빈 기자
  • 승인 2018.04.2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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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법정에 선 소크라테스의 최후 변론 담은 신간 출간
육신의 한계, 영혼의 영원함 꿰뚫은 인사이트 돋보여
사형 선고후 절친의 탈옥권유에도 “악법도 법이다”
사진=인터파크 캡쳐

[책 한권의 행복 - 소크라테스의 변명]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 “살기 위해서 먹어야지 먹기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 이야기를 명언(名言)이라 부른다. 그는 일생동안 단 한권의 책을 집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가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이장주 교수는 “소크라테스는 책이 기억력과 사고력을 감퇴시킨다고 여겨 저술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모든 것을 지켜본 제자 플라톤이 쓴 ‘대화록’이 소크라테스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산파술의 대가였던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받으면 화답하기를 회피했다. 역(逆)으로 질문을 던져 상대방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심지어 상대방의 무지를 자신은 안다고 생각해 다소 현학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신보다 우월한 이가 존재한다는 소문을 들으면 방문해서 역시나 무지함을 알게 해주는 것이 소크라테스였다. 상대방은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통해 생각했던 논리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당황하거나 화를 내거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를 ‘아포리아’라고 하는데, 이런 행동 탓에 수많은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재수 없는 지식인쯤으로 여겼다. 이에 아테네의 힘 있는 사람들과 소피스트들은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에게 지식을 전파하고 돈을 받으며, 국가적 숭배하는 신을 믿지 않고 별도의 종교가 있다는 것을 꼬투리 잡아 시민 법정에 세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의 시작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고발당한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변명 내지는 변론하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대화록을 정리한 플라톤이 쓴 책이다. 당시엔 지금과 같이 종교의 자유가 없어서 국가적 신을 숭배하지 않으면 사형까지 가능했다. 신앙 죄로 시민법정에 선 소크라테스가 시쳇말로 ‘죽지 않기 위해 용쓰는’, 무죄를 주장하는 장면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 이 책의 골자다.

‘변명’을 다룬 1장에서는 자신을 고발한 정치가 멜레토스와 배심원들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변론, 유죄선고후의 변론, 사형 선고된 이후의 변론 등 세 부분을 다룬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강한 용기를 보였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신을 부정하지 않았음을 피력하며 변론을 마친다. “배심원이 아닌 신에게 복종할 것”,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관들과 배심원들은 살고, 나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하지만 어느 쪽이 옳은가는 신만 알 수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그것을 증명한다.

2장 ‘크리톤’은 크리톤이 사형선고 이후 영어의 몸이 된 절친 소크라테스를 찾는 내용을 다룬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판결이 부당하다. 그러니 탈출해라”며 탈옥을 권유한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말을 한귀로 듣고 흘려버린다. 도덕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국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법을 준수해 탈옥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며 크리톤의 의견을 비판했다. “법을 위반하는 자는 아테네 시민들을 타락 시킨다. 위법행위는 정의와 덕에 대한 가르침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게 이유였고, 피할 수 있던 죽음에서 구태여 도망가지 않았다. 이것이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언이 탄생한 배경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 관해 기록한 중기 대화편 중 하나인 3장 ‘파이돈’은 영혼의 불멸성을 다룬다. 파이돈엔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왜 담담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묘사가 담겨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데아는 불멸로 봤다. 이데아의 불멸성이 영혼불멸의 근거가 된다. 육체는 현상계에 속해있기 때문에 수명이 다하면 소멸하지만, 영혼은 삶의 이데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단지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소크라테스는 “나 역시 아폴론 신의 제물이 될 종이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을 떠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대 정치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매사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 속칭 ‘PC충’이라며 비판받았을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고고한 삶을 살다 갔다.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절제에 큰 가치를 부여했다. 소크라테스는 목숨보다 도덕관념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아테네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나오는 이유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처참히 패배했다. 사회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부정부패, 도덕적 해이, 중우정치가 횡행하던 어지러운 시대였다. 법정의 재판관들과 정치인들은 시민의 이익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만을 중시하던 사람들이었으니, 도덕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입장으론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란 관측이 가능하다. 유력한 이들에게 쓴 소리를 하는 소크라테스는 어쩌면 필연적 제거대상이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굴하지 않고 법정에서 오히려 공동체 시민사회 전체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패기를 보여줬다. 소크라테스는 비록 독배를 마시고 죽었지만, 그 울림은 2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진다.

매사 도덕관념을 우선시했던 소크라테스가 본 우리네 현대 사회는 과연 어떻게 비춰질까. 작금의 사회 세태를 보면 물질 만능주의에 찌들어 인간의 존엄성은 무시당하고 있다. 자본주의 그 자체인 돈 앞에 사람이 한 없이 작아지는 사회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사회상을 본다면, 다시 한 번 독배를 든다면, 사회 정의를 위해 기꺼이 들어 주겠지만 과연 이런 상황을 보고도 또 다시 기쁘게 죽음을 맞이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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