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21> 간질병과 사회적 배려
상태바
[세종실록과 왕실의학] <21> 간질병과 사회적 배려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4.09 16: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 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경상도 곤양 사람 진겸의 아비가 간질(癎疾)로 고생하였다. 진겸이 손가락을 잘라 태워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 아비에게 먹였더니 즉시 나았다. 그 사실이 나라에 보고되자 관직을 제수했다. <세종 21년 10월 4일> @픽사베이

초기의 조선왕조실록에는 간질이 몇 차례 등장한다. 아들이나 딸이 간질을 앓는 부모를 위해 무명지(無名指)를 끊어 치료한 사연이다. 나라에서는 그때마다 효자 효녀로 정려했다. 태종 때는 평안도 안주에 사는 조존부의 행위가 선양되었다. 12살 어린 나이인 조존부는 무명지를 잘라 술에 타 어머니의 간질을 낫게 하였다.

세종 때는 경상도 사람 진겸이 단지로 관직을 얻었고, 단종 때는 평안도 안주 사람 오유린이 간질에 걸린 아버지 치료를 위해 왼손 무명지를 잘랐다. 얼마 후 어머니도 간질에 걸리자 오른손의 무명지를 잘라서 약을 지어 바쳤다. 

사람 손가락으로 간질 치료를 하는 기사는 인종 때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나라의 정책과 연관 있다. 유교사회가 자리 잡자 의료행위와 근거 없는 사술을 구분한 결과다. 조선은 유학을 국시로 내세웠다. 유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는 효도다. 조선 초에는 효를 권장하기 위해 의학적 근거가 없는 단지(斷指) 치료 행위도 의롭게 평가 했다. 그러나 건국 100년 무렵에는 유교정신이 사회전반에 확장되었다. 더 이상 미신적 의료 행위까지 포상할 필요가 없었다.

간질은 전해질 불균형, 산염기 이상 등 신체적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발작이 일어나는 만성질환이다. 의학용어로는 뇌전증이다. 간질은 생후 1년 이내에 가장 많고, 청소년기와 장년기 발생률이 떨어지다가 노년층에서 다시 증가하는 형태를 보인다. 

원인은 유전, 두부외상, 뇌졸중, 뇌종양, 선천기형, 뇌염, 퇴행성뇌병증 등 뇌의 병리적 변화로 파악된다. 치료는 약물, 항경련제, 수술 등이 있다. 

한의학에서는 간질인 뇌전증의 원인을 풍사(風邪)나 서사(暑邪), 역려지사(疫癘之邪)로 본다. 현대 의학 용어로는 유행성 감염성 질환으로 이로 인한 고열로 신경손상이 와서 오는 경련이다. 또 담음(痰飮)의 정체로 인해 기(氣)의 통로가 막히 것도 요인이다. 아기는 심하게 놀라도 불안과 뇌신경 경련이 일어날 수 있다. 외상으로 인한 어혈(瘀血)도 뇌신경 교란과 혈맥을 막아 경련을 유발한다. 선천적 원인인 태간(胎癎)도 거론된다. 태간은 산모가 심한 충격을 받으면 태아의 간과 심장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간질은 동양의 고전인 황제내경에 전질로 소개돼 있다. 원인은 태아 때 어머니의 놀람 영향으로 기가 역상해 정과 경기가 몰린 것으로 보았다. 의학강목에서는 담이 횡경막 위로 넘친 것을 원인으로 여겼다. 동의보감에서는 간질을 심기 부족으로 두부에 담과 열이 작용하는 풍현으로 표현했다.

치료는 뭉친 담을 삭이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등 원인에 따른 처방을 한다. 동의보감은 용뇌안신환, 오생환, 추풍거담환, 소단환, 묘항환, 가미수성원, 인신귀사단, 청심곤담환 등의 응용을 제시한다. 그러나 난치병이기에 치료가 쉽지는 않다. 중종 때 우의정 권균이 간질 악화로 사직을 청한다. 사직소에 치료법과 치료의 어려움이 담겨 있다.

“신은 숙환인 간질 때문에 해마다 침 맞고 뜸뜨면서 봉무해 왔습니다. 지금은 나이 많은 데다 고질병이 겹쳐서 전혀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혈기가 고갈되었고, 숙환인 간질까지 겹쳐 발병되었습니다. 다방면으로 치료를 해보았지만 전혀 효험이 없었습니다.” <중종 21년 8월 26일>

이 같은 점을 고려해 조선에서는 간질이 있는 사람을 장애우로 배려했다. 조선시대 사회적 배려를 받는 장애인에 장님, 농아 등과 함께 간질인도 포함한 것이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로 대한황실문화원 황실의학 전문위원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몸을 보(保)하고, 체중을 감(減)한다'는 한의관을 전파하고 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