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12> 세종시대 어의(御醫)와 대장금
상태바
[세종실록과 왕실의학] <12> 세종시대 어의(御醫)와 대장금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3.08 12: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8년은 세종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 픽사베이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조회를 받고 편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김점이 갑자기 자리를 떠나 땅에 엎드려 말했다. 신에게 자식 하나가 있는데 지금 감기를 앓고 있습니다. 내약방(內藥房)에 입직한 의원 조청(曺聽)에게 진료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종 1년 12월 11일>

세종은 정사를 논의하다가 신하의 황당한 청을 받는다. 판서 김점이 감기에 걸린 아들에게 어의(御醫)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어의는 궁궐에서 임금과 왕실 가족을 치료하는 의원이다. 임금이 특별히 궐밖에 사는 왕자나 관료에게 어의를 파견하는 은혜를 내리는 일은 가끔 있다. 그러나 신하가 임금에게 어의 파견 요청은 있을 수 없는 어이없는 경우다.

판서 김점의 행동은 권력 지도로 풀이할 수 있다. 당시 임금은 세종이지만 절대 권력은 상왕 태종에게 있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눈치를 살피며 정치실무를 익히는 ‘수습 군주’와 같았다. 대리청정 하는 왕세자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세종은 현안에 특별한 의견을 내기 보다는 앞선 정책 계승 형식을 취했다. 이 같은 젊은 왕, 세종의 위치는 신하들의 눈에는 어렵고도 높은 태종의 위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특히 김점은 조선 건국의 대들보 집안 출신이다. 태조가 인재를 뽑을 때 발탁된 김한귀 부터 내리 4대가 고관으로 일했다. 김점의 딸은 살아있는 권력인 태종의 후궁이고, 김점의 아내 권씨는 명나라 영락제의 모친 권마마와 핏줄로 연결된다. 당시 나이는 김점이 50세이고, 왕은 22세였다.

권위에 손상 받은 세종은 분노했다. 임금은 정색하며 김점과 참여 신하들을 질책했다. "전당(殿堂)은 임금과 신하가 나라 일을 상의하는 곳이다. 그런데 공공연하게 사사로운 청을 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김점의 잘못은 말할 것도 안 된다. 대간의 관원이 시좌(侍坐)하여 듣고서도 감히 규탄하지 못한다. 그 또한 비겁하다."

왕실의료의 핵심인 어의(御醫)는 내의원(內醫院) 소속의 당상 의관이다. 어의는 의술에 능한 당하 의관인 내의(內醫) 중에서 차출된다. 의약동참(議藥同參)과 침의(鍼醫)는 당상, 당하를 막론하고 모두 어의로 불린다.

왕실의 여성 진료와 치료는 의녀(醫女)의 몫이다. 의녀제도는 남자 의원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대부 여성을 위해 시작됐다. 태종 6년에 지제생원사인 허도는 “병이 든 여성이 남자의원에게 진맥 받는 것을 수치로 여깁니다. 이로 인해 사망도 속출합니다”라며 “관아 어린 여자아이 수십 명에게 의료 교육을 시켜 사대부의 부녀들을 치료하게 하는 게 해결책”이라고 상언했다. 태종이 윤허함으로써 의녀제도(醫女制度)가 시작됐다. 세종은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10~15세의 총명한 관아의 여종을 의녀로 양성하는 것을 제도화 했다.

의녀는 한문과 한글 교육과 함께 산서, 직지맥, 찬도맥, 가감사십방, 화제방, 부인문 등 진맥법, 조제법, 침구법 등 전문영역을 공부했다. 심화교육을 받은 의녀는 왕실 여성을 치료하는 내의원과 사대부와 일반 백성을 진료하는 외의원으로 각각 배치됐다.

의녀는 남자 의원의 보조원이다. 의녀는 진료와 간호를 하지만 처방은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처방을 하는 어의가 될 수 없다. 예외적으로 대장금은 중종의 어의인 여의(女醫)로 승격됐다. 중종실록에는 ‘의녀 대장금의 의술이 무리 중에서 뛰어나 내전에 출입하며 간병 한다’고 기록돼 있다. 대장금은 중종 28년을 비롯하여 39년 1월 29일, 39년 10월 26일, 39년 10월 29일 임금의 약을 다른 어의들과 논의하고 처방한다.

내의원은 왕의 약을 조제하던 관서다. 태종 때 내약방으로 불렸으나 세종 25년 6월에 내의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관원 16인으로 3품은 제거(提擧), 6품 이상은 별좌(別坐), 참외(參外)는 조교라고 했다. 내약방과 내의원을 관장한 것으로 추측되는 전의감(典醫監)은 대궐에 약재를 공급하고, 임금의 약재 하사를 관장하는 기관이다.

전의감과 내의원은 왕과 왕족을 위한 기관이고 어의는 왕과 왕실가족의 치료를 위한 의원이다. 백성이 이용하는 의료기관은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가 있다. 혜민서는 서민의 질병을 치료하는 곳이고, 활인서는 도성의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기관이다. 구체적으로 혜민서는 일반 백성의 질병을 다루는 시립병원 같은 역할을 했다. 활인서는 무의탁 환자 진료와 전염병 환자 치료와 간호를 맡았다. 무연고 시신 매장도 담당했다.

혜민서나 활인서는 도성을 중심으로 설치됐다. 전염병이 돌면 태종이나 세종은 각 고을 수령에게 약재를 내려 환자를 돌보게 했다. 지방에는 한양의 혜민서나 활인서 같은 전문적인 의료기관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관련기사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