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2> 외국 사신의 진상품 강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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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과 왕실의학] <2> 외국 사신의 진상품 강황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1.2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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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세종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유구(琉球) 국왕의 둘째 아들 하통련(賀通連)이 사람을 보내어 좌, 우의정에게 편지와 선물을 바쳤다. 선물은 단목(丹木) 5백 근, 백반(白磻) 5백 근, 금란(金襴) 1단, 단자(段子) 1단, 청자기(靑磁器) 열 가지, 심황(深黃) 50근, 천궁(川芎) 50근,  곽향(藿香) 50근, 청자화병(靑磁花甁) 하나, 침향(沈香) 5근이다. <세종 즉위년 8월 14일>

유구국은 일본 가고시마 남쪽의 오키나와현에 위치했던 왕국이다. 류큐국으로 불리는 이 나라는 동남아, 중국, 일본 등과의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1609년에 가고시마 사쓰마 번의 침공을 받았고, 1879년에는 일본에 강제 병합됐다. 

한의사 최주리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와 교류한 류큐국은 조선이 건국되자 조공을 했다. 1392년 9월 11 조선 태조의 조회 때 류큐국 사신이 참석했다. 류큐국 사신은 문관 5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 해 윤 12월 28일과 1400년 10월 15일에 류큐국의 중산왕(中山王) 찰도가 신하를 칭하며 예물을 바쳤다. 1409년 9월 21일에는 찰도를 이어 왕이 된 사소가 조선에서 여러 차례 보내준 선물에 대해 감사 사신을 보냈다. 또 류큐국에서는 몇 차례 왜구에 의해 노예가 된 조선인을 송환했다.

태종은 왜구에게 포로가 돼 류큐국으로 팔려간 백성들의 쇄환을 위해 1416년 1월 27일 이예(李藝)를 사신으로 보내 44명을 귀국시켰다.

세종 즉위년인 1418년 8월 14일 류큐국에서 예물을 바쳤다. 2년 전 이 예가 류큐국을 방문해 많은 선물을 준 답례 의미였다. 예물은 활을 만드는 재료인 단목, 공예직물인 금란, 화려한 도자기, 고급스러운 향이 나는 침향 등 사치품이다. 또 약재인 심황(深黃), 천궁(川芎), 곽향(藿香)도 있었다.

약재 중 주목되는 것은 심황(深黃)이다. 인도 남부가 원산지인 심황은 옛사람들에 의해 염료, 양념, 흥분제, 향신료, 화장품으로 활용됐다. 약용은 뿌리줄기가 이용되는데 성질은 약간 쓰면서도 화끈거린다.

심황은 울금, 생강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실학자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한자 ‘울금(鬱金)’ 옆에 한글로 ‘심황’이라고 적었다.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중국의 본초도경을 인용해 ‘강황(薑黃)은 3년 이상 묵은 생강’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심황은 울금이 아니고, 생강도 아니다.

선조는 36년(1603년) 1월 3일 당상관과 낭청을 파직한다. 이유는 왕실 제향 때 쓰는 울창주의 원료를 울금에서 심황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울금과 심황은 다른 것이다. 생강과도 모양만 비슷할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심황은 아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강황으로 여겨진다. 생강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 강황은 소염, 항암, 항산화 효과가 있다. 고지혈증과 심혈관 질환 예방, 체지방 분해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어혈, 혈종, 종기를 삭이는 데 활용한다.

동의보감에서는 강황을 다음처럼 설명했다. “성질은 뜨겁고(熱), 맵고(辛), 쓰다(苦). 효능은 울금 보다 강하다. 혈괴(血塊), 옹종(癰腫), 월경, 어혈, 풍, 기창(氣脹)에 좋다. 해남산은 봉아술(蓬莪), 강남(江南)에서 나는 것은 강황이다.”

동의보감은 명나라 이시진이 지은 본초강목을 인용했다. 따라서 강남이나 해남은 중국 남부지역을 일컫는다. 강황은 수천 년 전부터 인도 등 남아시에서 전통의학, 염료, 향신료 재료로 쓰이다가 동아시아에서는 한약재로 활용됐다.

노란색 강황으로 조선이 고민한 적도 있다. 옛사람은 색에 의미를 부여했다. 검은 현(玄)은 하늘과 시원을 뜻하고, 노란 황(黃)은 땅을 뜻했다. 황제의 평상복은 황색과 자색(紫色)이다. 중국의 백성은 황제의 색깔인 현, 적, 자색에 신경을 써야 했다. 조선도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해 노란 황색 사용을 자제했다. 세종은 27년 8월 6일 의정부에 전지했다. " 현(玄)은 하늘빛이기 때문에 가장 높고. 황제의 평상복은 황색이다. 황(黃)은 땅 빛이기 때문에 신자는 입지 못한다."

태종 17년 5월 20일, 일본 사신이 강황인 심황(深黃)을 바쳤다. 외교를 담당한 예조는 선물 수령 여부를 고민한다.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하면 민감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태종은 일본의 강황 선물을 받지 않는다.

이에 비해 세종은 류큐국의 강황 예물을 받았다. 중국과의 관계가 아닌 류큐국의 성의만 생각했다. 또 답례품도 충분하게 보냈다. 강황은 일본이나 류큐에서 조선의 임금에게 바칠 정도로 소중한 약재였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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