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침묵 '대형 M&A' 성사시킬까... 이재용, 작심하고 유럽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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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침묵 '대형 M&A' 성사시킬까... 이재용, 작심하고 유럽行
  • 유경표 기자
  • 승인 2022.06.0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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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이건희 '신경영' 선언 있던 날 출국
'위기론' 삼성... 글로벌 경영으로 돌파구
ASML 찾아 EUV 장비 수급 논의 전망
"재판 불출석 감수할 정도로 경영상황 엄중"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일 오전 11시 45분경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로 들어서는 모습. 사진=유경표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일 오전 11시 45분경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로 들어서는 모습. 사진=유경표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유럽 출장을 통해 글로벌 경영행보를 재개했다. 지난해 12월 중동방문 이후 6개월만이다. 1993년 6월 7일 고(故)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고 일갈했던 삼성그룹의 ‘신경영’ 선언과 날짜도 동일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글로벌 IT 업계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삼성전자가 영위하고 있는 반도체 및 파운드리  등 핵심 사업에서 ‘위기론’이 불거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8월 가석방된 이후, 5년간의 취업제한 등 법령상 규제에 얽매인 상황임에도, 글로벌 현장 경영을 통한 돌파구 마련에 주력하는 모양새다.

이 부회장은 7일 오전 11시 45분경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를 통해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담담한 표정으로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이 부회장은 출장 일정 등에 대해 묻는 취재진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잘 다녀오겠다”는 짤막한 인사말만 남긴 채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 부회장은 이달 18일까지 총 12일간 네덜란드와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특히, 2017년 전장 업체인 하만 인수를 마지막으로 5년여간 침묵해 온 삼성전자의 대형 M&A가 성사될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삼성의 미래 신성장동력 "해답은 유럽에 있다"

먼저, 이 부회장은 첫 일정으로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도착해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 ASML 본사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ASML은 반도체 미세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 노광장비(EUV)를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업체다. 이 부회장은 ASML을 방문한 자리에서 노광장비 수급 문제와 협력 방안 등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EUV 공정은 극자외선 광원을 사용해 선폭이 나노(㎚·1㎚=10억분의 1m) 수준의 초미세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기술이다. 기존 불화아르곤(ArF) 장비보다 더 미세한 회로를 구현할 수 있다. 5나노 이하 공정에서는 EUV 장비 확보 여부에 따라 업체간 우열이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사업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지만, 글로벌 1위 업체인 대만 TSMC의 벽을 좀처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는 지난해 4분기 매출액 기준 52.1%로 압도적 점유율을 기록한 반면, 삼성전자는 18.3%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TSMC는 EUV 장비를 100여대 가량 보유하고 있지만,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 설치된 EUV 장비는 15대 가량에 그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3나노대 기술경쟁으로 접어든 파운드리 분야에서 삼성전자가 살아남기 위해선 EUV 장비를 선점하는 것이 가장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ASML이 1년에 생산할 수 있는 EUV 장비 수량은 40~50대 수준에 불과하다. 1대당 가격이 1500억원을 넘지만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수요가 높기 때문에 EUV 장비를 사들이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부회장은 이번 ASML 방문을 통해 향후 삼성전자가 EUV 장비를 원활하게 확보할 수 있도록 방안을 모색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부회장은 ASML과의 우호적 관계 형성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그는 2020년 10월에도 ASML 본사를 찾아 피터 버닝크 최고경영책임자(CEO) 등 경영진과 회동을 갖고 EUV 반도체 장비 수급방안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부회장의 이번 유럽 출장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대형 M&A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될 것인지 여부다. 네덜란드에는 삼성전자의 유력 M&A 후보군으로 꼽혀 온 차량용 반도체 업체 NXP가 있다. 이 회사는 차량용 반도체 분야에서 전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장사업은 삼성전자의 미래 신성장동력에서 중요한 포지션에 놓여 있다. 자동차 산업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빠르게 옮겨감과 동시에 자율주행 기술 등이 부각됨에 따라, 차량용 반도체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는 추세다. NXP를 인수할 경우, 삼성전자는 차량용 반도체 사업에서 ‘퀀텀점프’를 노릴 수 있다. 다만, NXP의 현재 기업가치가 80조원대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도 유럽에는 삼성전자의 대형 M&A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몇몇 기업들이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영국에는 팹리스(반도체 설계)업체인 ARM이, 독일에는 차량용 반도체 기업 인피니온 등이 있다. 

ARM은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매물이다. 이 회사의 대주주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ARM을 매물로 내놓기로 결정하면서, 시장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최근 이 부회장과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의 회동을 두고, 업계 일각에서는 ARM 인수를 위해 양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들의 약 90%는 ARM의 반도체 설계 아키텍쳐를 따르고 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퀄컴, 애플 등은 ARM으로부터 기본 반도체 설계를 구입해 AP를 제조하고 있다. 따라서 ARM을 인수할 경우, 삼성전자는 팹리스 분야에서 유리한 입지를 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시장경제DB
사진=시장경제DB

 

심상찮은 대내외 경영환경... 글로벌 경영 고삐

이 부회장은 2019년 발표한 ‘반도체비전 2030’에서 10년 안에 파운드리를 중심으로 시스템반도체 분야 1위를 달성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글로벌 IT 기업들이 핵심기술을 보유한 회사들에 대한 M&A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도 수년간 멈춰있던 대형 M&A를 다시 본격화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 같은 전망에 힘을 싣듯,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DX부문장) 역시 6월 31일 호암상 시상식 참석 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M&A가 진행 중임을 암시한 바 있다. 앞서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2' 기자간담회에서도 한 부회장은 반도체, 모바일, 가전 등 전 사업 부문의 M&A 가능성과 관련해 "조만간 좋은 소식이 나올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편, 가석방 이후 특별한 대외활동 없이 침묵해 온 이 부회장이 최근 경영보폭을 늘리고 있는 배경에는 ‘컨트롤타워’ 부재 상황이 장기화될수록, 삼성 경영 전반의 위기감도 함께 증폭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재계에서는 급변하는 대내외 경영환경 속에서 이 부회장의 풍부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도 적잖다.    

이 부회장은 자본시장법 위반 등 의혹 사건 공판에 매주 목요일마다 피고인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그가 지난 정권 5년 동안 법원에 출석한 횟수만 무려 120번에 달한다. 자본시장법 위반 의혹 사건이 아직 1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항소심과 대법원의 판결이 나기까지 수년이 더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공판중심주의기 때문에 피고인이 재판에서 빠진다는 것은 불리한 측면이 없지 않은데, 재판부 허락과 검찰 동의도 구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라며 “해외 주요 기업 CEO와의 회동을 조율할 때 상대방 일정을 맞춰줘야 하기 때문에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그럼에도 공판에 불출석하면서까지 해외 출장에 나서는 것은 그 정도로 대외 경영환경이 심상치 않고 엄중하다는 것”이라며 “이 부회장이 민간 외교관으로 비즈니스 측면에서 활발히 일할 수 있도록 해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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