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준법감시委를 위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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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준법감시委를 위한 제언
  • 양원석 기자
  • 승인 2020.03.1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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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승계' 확정판결 전... 준법委, 경영 감시에 집중할 때  
전문가들 "준법위 출범 긍정적, 기업 투명성 제고에 기여할 것"
올해 1월9일 김지형 전 대법관이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지평 대회의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출범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기륭 기자.
올해 1월9일 김지형 전 대법관이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지평 대회의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출범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기륭 기자.

11일 오후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위원장 김지형 前 대법관)가 국내외 언론사 재계 출입 기자들에게 보낸 한편의 이메일이 만만치 않은 여진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메일에는 위원회가 이재용 부회장 및 삼성그룹 주요 7개 계열사 대표에게 보낸 ‘권고’가 담겨 있습니다.

권고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이 부회장 경영권 승계, 계열사 노동 이슈, 시민사회와의 소통, 위원회 역할에 대한 일각의 우려 불식을 위한 조치 방안 강구 등이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앞선 3가지는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최우선 준법 의제’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위원회가 내부의 입김이나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본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이재용 부회장의 공개적 입장 표명을 요구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메일을 받은 상당수 기자들은 위원회의 권고문에 담긴 속뜻을 파악하고자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위원회가 보낸 권고문의 수위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입니다. 취재에 나선 기자들 사이에서는 “위원회가 오버했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기자들이 ‘오버’로 인식한 대표적 대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법원이 심리 중인 사안, 혹은 아직 기소조차 이뤄지지 않은 수사 중인 사안까지 두루뭉술하게 묶어 총수 이재용의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위원회는 권고안을 ‘제안’이라고 표현했으나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위원회의 위상과 권한, 출범 배경과 과정 등을 고려할 때 이 부회장이나 삼성 측이 위원회의 권고 혹은 제안을 거절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위원회의 권고는 “판결이 확정되기도 전에 유죄부터 인정하라”는 요구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파격을 넘어 당혹감을 안겨줬습니다.

두 번째는 ‘시민사회와의 소통 부족’을 지적하면서 그룹 차원의 구체적 대안 제시를 요구한 점입니다. 삼성준법감시위는 어디까지나 삼성이란 대기업 집단의 준법경영을 감시·통제하는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조직이지, 간판만 바꿔 단 시민단체가 아닙니다.

◆삼성준법위 본질은 ‘기업 컴플라이언스 조직’... 11일 권고문, 위원회 권한 벗어나

상법, 회사법, 경제법 학자들의 의견을 정리하면 기업 컴플라이언스 조직의 역할은 ‘준법경영 감시 및 통제’에 있습니다. 컴플라이언스 제도 도입 초기에는 기업 회계에 대한 감시에 치우쳤으나 이후 그 역할이 점점 확대돼 현재는 ▲하도급법, 공정거래법 등 경쟁 관련 실정법 위반 여부 ▲기업 스스로 제정한 윤리강령 또는 준법경영 가이드라인 준수 여부 ▲기업 내부 위법행위 제보 접수 및 조사 ▲준법경영 관점에서의 거래 관계 모니터링 ▲준법경영 임직원 교육 등을 포함합니다. 

기업 컴플라이언스 조직에 대한 근거법령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금융회사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25조, 26조)이며, 다른 하나는 상법(542조의 13)입니다. 우리 법은 컴플라이언스 제도를 도입하면서 ‘준법감시인’ 혹은 ‘준법지원인’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말 명칭은 다르지만 영문은 두 제도 모두 ‘compliance officer’라고 씁니다. 세부 직능에서 차이가 있으나 본질은 같은 제도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컴플라이언스 조직은 그것이 준법감시인이든 준법지원인이든 실정법·자율규범 준수 여부 감독, 회계 부정 감시라는 공통 목적을 가진 ‘기업 내부 통제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역시 본질에서 이들 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위원회가 삼성 계열사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습니다. 조직의 하드웨어가 기업 내부에 있든 밖에 있든 위원회가 삼성그룹 핵심 계열사들의 준법경영을 감시·통제하기 위해 태동한 컴플라이언스 조직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준법위의 출범목적, 본래 역할과 기능을 고려할 때 11일 이들이 발표한 권고문은 그 한계에서 벗어났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총수 공개 사과, 시민사회 소통 활성화는 '이사회' 결정 사안

‘과거 경영권 승계 관련 사안 전부에 대해 공개 사과하라’는 권고는 기업 컴플라이언스 조직의 역할과 맞지 않습니다. 이 부회장에게 권고한 사과의 성격이, 대기업집단 총수로서 윤리적 혹은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데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총수의 사과’가 필요하다면 이는 회사의 이사회가 사법부 최종 판단을 지켜본 뒤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경영권 승계’ 이슈는 지금도 법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인 현안입니다. 경영권 승계 관련 이슈 중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비율 부당 산정 의혹,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의혹은 기소조차 안 됐습니다.

시민사회와의 소통 부족을 지적하며 공개적으로 대안을 발표하라는 권고는 근거 자체가 모호한 일종의 ‘경영개입’입니다.

시민사회와의 소통 부족이 문제라면 이 역시 이사회에서 논의하면 될 일입니다. 기업 컴플라이언스 조직이 시민사회와의 소통 부족마저 지적하고 나선다면 이사회 권한을 침해하는 위법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 “삼성준법위 출범은 긍정적”... 준법경영 파수꾼 역할에 집중해야

준법위의 11일 권고문은 위원회 존재 이유를 다시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권고문 내용의 적절성이 논란을 초래했지만 부정적 시그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삼성 준법위는 그 출범 자체가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실험이자 도전입니다.

기업 총수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된 위원 구성, 준법경영 위반 사례에 대한 직접조사권, 위원회를 보좌할 전문지원조직 구축 등은 국내 컴플라이언스 제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파격적입니다.

학계에서는 준법위의 이런 특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특히 총수와 단절된, ‘위원회 구성 및 운영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높이 평가하는 견해가 많습니다. 국내 대기업집단이 ‘재벌(財閥)’이란 전근대적 꼬리표를 떼고, 경영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변곡점이 될 것이란 기대감을 나타내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습니다.

기업소송연구회장을 맡고 있는 전삼현 숭실대 법대 교수는 “진행 중인 이 부회장 사건 이면에는 기업 총수가 정치권력자로부터 뇌물을 요구받을 때, 이를 거부할 수 없는 대한민국만의 특수성이 존재한다”며 “새로 출범한 삼성 준법위는 정치권력자로부터의 뇌물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습니다.

기업 컴플라이언스 제도 전문가인 최승재 변호사(대한변협 법제연구원장)는 “삼성이 그룹 밖에 독립된 위원회를 둔 것은 우리나라 기업 준법감시기구의 역사 전개를 볼 때 의미 있는 발전”이라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위원회는 11일 권고문을 각 언론사에 배포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권고안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근간으로 삼성의 윤리·준법경영을 위한 파수꾼 역할에 집중하고, 준법 감시 프로그램을 전반적이고 실효적으로 작동하게 하며, 준법 감시 분야에 성역을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 위원회의 결과물입니다.’

위원회가 전문가들의 바람대로 국내 기업들의 경영 품질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촉매제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다짐한 것처럼 ‘삼성의 윤리·준법경영을 위한 파수꾼 역할에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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