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증·여론재판... 막나가는 '프로포폴' 보도(報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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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증·여론재판... 막나가는 '프로포폴' 보도(報道)
  • 양원석 기자
  • 승인 2020.02.19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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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비평] 아니면 말고? '유명인 프로포폴 의혹' 기사의 폐해
관음증적 보도 행태... 의혹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잔상효과   
재판 전부터 범죄자 단정... 언론이 만든 '유죄 추정의 원칙'   
우리법연구회 이광범 변호사... 법관 재임 중 '언론의 재판 개입' 경고
뉴스타파 보도 영상. 사진=화면 캡처.
뉴스타파 보도 영상. 사진=화면 캡처.

흐릿한 화면 속에 스산한 느낌을 주는 음향. 
기업 총수 이름을 의도적으로 드러낸 제보자의 목소리
화면에 뜨는 같은 내용의 자막. 

다음 컷, 하얀 액체를 담은 앰플이 링거를 통해 흐르는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이어서 프로포폴 앰플을 배경으로 누구나 알만한 기업 총수의 상반신이 떠오릅니다. 

13일 전파를 탄 뉴스타파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프로포폴 상습 투약 의혹' 보도 영상은 이렇게 시청자의 눈길을 잡아끌었습니다. 

영상을 보면 제작진의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영상에 사용된 음향과 편집 기술은 '이 부회장 프로포폭 투약 의혹'을 사실로 받아들이게끔 시청자들에게 강한 잔상(殘像)을 남겼습니다. '의혹'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영상을 시청한 사람이라면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 총수가 상습적으로 약물을 사용했다'는 인식을 저항 없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입니다.  

위 매체가 게재한 영상은 최근 불거진 ‘연예인, 재벌, 연예기획사 대표 등 프로포폴 투약 의혹 보도’와 함께 온라인에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일련의 프로포폴 보도가 안고 있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독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관음증적 보도 행태, 다른 하나는 언론이 법원 위에 군림하는 ‘여론재판’(trial by newspaper)의 폐해가 그것입니다. 

◆의혹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의도적 영상 편집... ‘가짜뉴스’ 출발점 될 수 있어 

유명연예인과 정치인, 재벌, 조폭, 그리고 약물은 우리 영화계가 대중을 극장으로 끌어모을 때 즐겨 쓰는 단골 장치입니다. 이들 소재가 얽히고설킨 영화 속 장면은 사람들에게 묘한 쾌감을 안겨 줍니다. 일종의 ‘블랙 판타지’라고 볼 수 있는 이런 장르의 영화에는 흔히 관객의 욕구를 자극하는 ‘훔쳐보기’ 장면이 배치되곤 합니다. 이제는 고전이 된 샤론 스톤 주연의 1993년 작 <슬리버>는 관음증을 소재로 한 대표작입니다.

관음증은 영화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언론도 비슷한 요소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별장 성접대 의혹 사건’을 다루면서 우리 언론이 보여준 선정적 보도 행태는 언론의 옷을 입은 <슬리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뉴스타파의 영상은 이런 점에서 별장 성접대 의혹 보도와 많이 닮았습니다. 특히 유명인의 비밀스런 사생활을 훔쳐보는 느낌의 영상 편집은 시청자들의 내재된 관음증을 자극합니다.

이런 보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의혹을 사실처럼 믿게 만드는 잔상효과입니다.

별장 성접대 의혹 보도를 접한 사람은 대부분, 검찰의 수사나 법원의 판결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관련 기사 내용을 무의식 중에 사실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프로포폴 투약 의혹 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검찰의 수사 결과와 관계없이 이미 언론이 유죄를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만든다는 점에서 관음증적 보도는 정당성이 없습니다.

◆법무부 ‘형사사건 공개 금지 규정’... 내사·피의사실, 대상자 實名 비공개 원칙  

보도의 ‘목적’과 ‘내용’을 기준으로 할 때도 일련의 프로포폴 뉴스는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우려됩니다. 이런 류의 보도는 기본적으로 검찰의 기소를 전제로 합니다. 넓게 볼 때 형사사건 보도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형사사건 보도는 그 결과가 피고인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체에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일정 수준 국가의 제한을 받습니다.

지난해 12월 1일부터 시행 중인 ‘인권 보호 수사규칙’(대통령령)과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법무부 훈령)은 관련 보도의 허용 기준과 범위를 구체적으로 담았습니다. 이들 규정에 따르면 내사 및 피의사실, 수사상황에 대한 정보공개는 원칙적으로 금지됩니다.

‘국민 알 권리’ 보장을 위해 예외적으로 공개를 하는 경우에도 수사에 관여치 않은 전문공보관과 형사사건공개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치도록 했습니다.

공개를 할 수 없는 수사 정보에는 피내사자 혹은 피의자의 실명(實名)도 포함됩니다. 수사 정보 공개를 엄격히 제한한 이유를 법무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수사 정보 흘리기, 망신주기식 수사, 여론재판 등이 관행적으로 이뤄지면서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피의자를 범죄자로 낙인찍어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피의자 인권보장과 형법상 피의사실공표죄 사문화를 막기 위해 규정을 제정했다.”

위 규정을 기준으로 할 때 국내 언론의 프로포폴 보도는 후진적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의혹을 사실로 둔갑시키는 자극적 영상 편집은 다분히 악의적입니다.

◆‘진보 법조인 맏형’ 이광범 판사 “무차별적 보도, 피의자 방어권 침해”

이광범 부장 게재 논문. 사진=화면 캡처.
이광범 부장 게재 논문. 사진=화면 캡처.

2005년 우리법연구회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진보 법조인’의 맏형으로 불리는 이광범 전 부장판사(사법연수원 13기 / 현 L.K.B & Partners 대표변호사)는 2000년 사법연수원 교수 재임 시절, 국내 언론의 형사사건 보도가 안고 있는 법리적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는 논문 한 편을 발표했습니다.

이 부장판사는 마치 현재 언론의 보도 행태를 예상이라도 한 듯 ‘여론재판’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다음은 그의 논문 <재판 관련 보도의 문제점과 전문성 제고 방안> 중 일부입니다.

‘상업주의적 언론은 독자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을 수 없고, 때로는 언론이 대중적 구미를 부추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언론의 재판보도 역시 다수 독자의 의견에 영합하는 경향을 띠게 되는 경우가 많고, 여기에 다시 대중의 집단적, 감상적 대응이 가세하며, 언론사간 취재 및 보도경쟁에 따라 이러한 경향은 더욱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보도 태도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야기하지만 우선 지적할 것은 이른바 여론재판(trial by newspaper)의 폐해이다.’

이 부장판사는 ‘여론재판의 폐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형사사건의 보도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피의자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수사 중인 상태에서부터 그가 진범인 것처럼 단정적으로 보도함으로써,

피의자는 정식재판을 받기도 전에 변명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유죄로 단정되어 사회적으로 악인으로 낙인이 찍히는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뉴스타파를 비롯한 프로포폴 관련 기사들의 특징은 ‘불법임을 전제로’, ‘수사나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범죄자로 단정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들 기사는 이 부장판사가 우려한 여론재판의 폐해를 모두 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같은 논문에서 이 부장판사는 ‘언론에 의한 형사소송의 수행’이란 현상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형사사건에 관한 이러한 언론보도의 태도는 사건과의 관련성 여부나 증거능력의 여하를 불문하고 잡다한 증거를 미리 제시하고 평가하며,

혐의자에 대하여 유리하거나 혹은 불리한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사실상 형사소송에 개입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것이 이른바 [언론에 의한 형사소송의 수행]이라고 일컬어지는 폐단이다.’

뉴스타파는 구속 중인 전직 간호조무사의 남자친구를 공식신고자로 등장시켜, 그가 여자친구의 휴대폰에서 내려받았다는 메신저 대화 캡처 사진을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이 부분은 [사건과의 관련성 여부나 증거능력의 여하를 불문하고 잡다한 증거를 미리 제시해, 형사소송에 개입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위 논문 내용을 연상케 합니다.

이 부장판사는 ‘피고인의 유죄를 단정하여 비난하는 언론의 보도는 형사소송법상의 증거법칙을 무력화시킨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언론의 무차별적 보도는 이런 법칙을 무력하게 만들며, (중략) 결국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박탈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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