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0원 횡령 판결'로 이재용 엮은 의원들... 교묘해진 법원 겁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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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0원 횡령 판결'로 이재용 엮은 의원들... 교묘해진 법원 겁박
  • 양원석 기자
  • 승인 2020.02.06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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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pick] '파기심 재판부 비난' 범여권 의원들 공동성명 분석
국회의원들 재판부 헐뜯기 혈안... '비판'과 '비난' 구분 못해
버스기사 2400원 횡령 해고사건 억지 인용... 팩트마저 오류
왜곡·궤변으로 상고심 판결 취지 멋대로 해석... '재판 개입' 정당화 
4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국회의원 노동·시민단체 공동 기자회견. 사진=참여연대 홈페이지 화면 캡처.
4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국회의원 노동·시민단체 공동 기자회견. 사진=참여연대 홈페이지 화면 캡처.

“2017년 법원은 버스요금 2400원을 횡령한 혐의로 해고된 버스 기사에 대해 정당한 해고라고 판결했다. 17년간 성실하게 일했던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었고, 해당 판결에 대해서는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 

위 발언은 4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범여권 국회의원 및 시민단체 기자회견에서 나온 발언 중 일부입니다.

'재벌개혁·정경유착근절·사법 정의 실현을 희망하는 국회의원·노동·시민단체 공동 기자회견'이란 긴 제목이 붙은 이날 행사에는 박용진 의원을 비롯 민주당 정의당 민주평화당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 16명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노동시민단체 가운데는 민주노총 한국노총 경실련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YMCA전국연맹이 참여했습니다.

박 의원 등이 주도한 기자회견은 표면적으로 재벌개혁과 정경유착 근절을 앞세웠지만 이들의 시선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파기환송심 사건 재판부를 향했습니다.

이들은 재판부가 삼성준법감시위원회 실효성 검증을 위해 전문심리위원제를 도입키로 결정한 사실을 두고, 원색적인 표현을 섞어 비난 수위를 높였습니다.

앞서 이 부회장 사건 파기심을 심리 중인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 부장판사)는 17일 이 사건 4차 공판을 열고, 전문심리위원제 도입 방침을 밝혔습니다.

삼성준법감시위원회(위원장 김지형 전 대법관) 운영 효과를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위해서는 검증된 외부전문가에 의한 실사가 필요하다는 것이 재판부 판단입니다.

우리 형사소송법은 ‘소송관계를 분명하게 하거나 소송절차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직권 또는 검사, 피고인, 변호인의 신청으로 전문심리위원을 지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같은 법 279조의2). 전문심리위원은 공판준비 및 공판기일에 출석해 의견을 기재한 서면을 제출하거나 의견을 진술할 수 있습니다. 재판장의 허가를 받아 피고인 또는 변호인, 증인 또는 감정인 등 소송관계인에게 필요한 사항을 직접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전문심리위원제는 우리 법이 재판장에게 부여한 ’소송지휘권‘의 확장형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회장 파기심 재판부의 결정에 양재식 특검보는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며 ‘재판 불공정’을 주장했습니다. 삼성준법감시위와 그 실효성 검증을 위한 전문심리위원단이 결국 ‘이재용 피고인’을 봐주기 위한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 특검 주장의 요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차 공판이 끝난 직후, 약속이라도 한 듯 ‘재판부 헐뜯기’가 시작됐습니다.

◆재판부 겁박, 공판 직후부터 시작돼

19일에는 참여연대가 특검의 시각을 반영한 논평을 냈으며 21일에는 박용진 의원이 주도한 국회의원 노동·시민단체 공동성명이 나왔습니다. 22일에는 공동성명에 참여한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과 민변 참여연대 등이 긴급좌담회를 개최했습니다. 민변과 참여연대 소속 변호사들은 간담회를 통해 재판부 결정을 법리적 관점에서 ‘비난’했습니다. 

4일 오전 열린 기자회견은 21일 나온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성명의 기본 골격과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눈에 띄는 건 당초 공동성명에는 46명의 범여권 국회의원이 이름을 올렸으나 기자회견에서는 그 수가 16명으로 대폭 줄었다는 점입니다. 다만 이 부회장 파기심 재판부에 대한 비난의 수위나 표현 등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범여권’ 국회의원이란 점, 참여연대 경실련 민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현 정권 출범에 크게 기여한 친정권 성향 노동시민단체라는 점, 뿌리 깊은 반기업 정서를 공유한다는 점 등이 그것입니다. 겉으로는 ‘공정한 판결을 촉구한다’면서도 속으로는 ‘피고인 이재용에 대한 엄벌과 단죄’를 강조하고 있는 점도 공통분모입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재판부에 대한 겁박’이나 다름이 없을 만큼 표현이 과격하고 원색적입니다. 팩트에 바탕을 둔 정연한 논리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전형적 프로파간다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부회장 사건 4차 공판 후 시작된 범여권의 재판부 헐뜯기를 비판이 아닌 비난이라 판단한 이유입니다.

◆비판(批判) 아닌 비난(非難)에 매몰된 의원들

‘비판’과 ‘비난’은 다릅니다.

비판(批判)은 ‘현상이나 사물의 옮고 그름을 판단해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활동’을 말합니다. 시비(是非)를 판단하고 밝히는 행위이므로 비판은 ‘논리’와 ‘팩트’ 두 가지를 필수요건으로 합니다.

비판은 논리와 팩트로 시비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듣는 사람에게 비판은 따갑고 성가시고 불편할 수 있지만 시비에 대한 명확한 판단과 지적은 몸에 좋은 약처럼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비난(非難)은 ‘남의 잘못이나 흠을 책잡아 나쁘게 말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비판의 형식을 취하되 논리가 빈약하거나 팩트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비판이 아닙니다. 비판의 외형을 갖추었다고 해도 그 실질이 남을 헐뜯는 데 있다면 그것은 비판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교수, 변호사, 회계사와 같이 전문성을 상징하는 자격을 가진 이들이, 그 신분을 누군가를 비난하는데 악용한다면 그 폐해는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회장 파기심 사건 4차 공판이 끝난 직후 범여권 및 반기업 성향 노동시민단체가 보인 일련의 움직임을 비난이라 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엉뚱한 판례 인용해 여론 선동... ‘버스요금 횡령사건’, 이 부회장 사건과 공통점 全無

하나는 팩트의 왜곡입니다.

기사 첫머리에 인용한 발언은 이 부회장 사건 파기심 재판부에 대한 공동 기자회견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발언자는 ‘버스요금 2400원’과 ‘뇌물 86억원’이 갖는 극적 효과를 전면에 내세워 현장에 모인 기자들을 선동했습니다. 한쪽에는 현금 2400원을 회사에 입금치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노동자를, 다른 한쪽에는 무려 86억원이란 거금을 대통령에게 갖다 바치고도 선처를 받는 재벌 총수의 모습을 배치했습니다. 연출도 탁월했지만 묘사는 더욱 극적입니다.

“버스요금 24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17년간 성실하게 일한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었다”, “그런 판결을 내린 사법부가 대한민국 최고 기업 삼성의 총수 일가와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선 왜 이리 물러 터졌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두 문장만 봐도 분노가 치밀어 오를 법합니다.

범여권 국회의원들이 인용한 ‘버스기사 2400원 횡령사건’ 항소심은 광주고법 전주 제1민사부가 심리했습니다. 법원은 2017년 7월18일 이모씨(52)가 (유)호남고속을 상대로 낸 해고무효확인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이씨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이씨는 2014년 1월3일 승객이 낸 요금 중 일부를 회사에 입금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됐습니다. 이씨가 횡령한 금액은 2400원. 이씨는 ‘단순 실수’라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사측은 “횡령액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라며 해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씨는 “강성노조인 민노총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사측이 표적 징계를 내린 것”이라며 법원에 해고무효 확인 소를 제기했습니다. 1심 법원은 이씨의 주장을 받아들여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으나 항소심 판단은 달랐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원고가 운송수입금 관련 징계를 받은 사실이 없고, 횡령액이 소액이라고 해도 ‘운송수입금 횡령행위’는 사회통념상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책임있는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시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가혹하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당시 피고 회사가 노조와 체결한 단체협약은 해고사유로 ‘운송수입금 착복’을 적시하고 있었으며, ‘버스 내 CCTV 판독 결과 운전사의 수입원 착복이 적발됐을 때 금액의 다소를 불문하고 해임을 원칙으로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단체협약 중 해고 사유를 보면 항소심 재판부가 위와 같은 판결을 내린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범여권 의원들의 팩트 왜곡은 더 있습니다. 의원들이 서명한 공동성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특검 수사와 대법원 판결을 통해 이 사건의 배경이 이재용 부회장을 위한 후계작업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중략) 그에 합당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비율과 의도적 가치 불리기,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증거인멸 등 연관된 사건들의 증거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이 사건 1~3심 재판부는 모직-물산 합병비율 및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의혹에 대한 특검 공소사실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부회장 혐의를 가장 넓게 인정한 1심 재판부는 물론이고 이 사건 전원합의체 상고심에 참여한 13명의 대법관들도 위 두 가지 쟁점에 대해선 특검 주장을 배척했습니다.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범여권 의원과 반기업 성향 노동시민단체는 기회만 되면 같은 허위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는 명백한 사실 왜곡이자 여론 선동입니다.

◆양형 판단은 법관 고유권한... 기자회견 빙자한 국회, 시민단체의 ’재판 개입‘

삼성준법감시위원장직을 수락한 김지형 전 대법관. 사진=이기륭 기자.
삼성준법감시위원장직을 수락한 김지형 전 대법관. 사진=이기륭 기자.

두 번째는 이들 주장에 스며있는 궤변입니다.

범여권 의원들은 ”이재용 부회장 양형심리에 준법감시위원회가 결코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무죄 판단과 양형 판단은 법관의 고유권한입니다. 누구도 그 권한을 침해할 수는 없습니다. 양형 근거 내지 이유에 대한 판단이 국회 또는 시민단체 그 밖의 다른 제3자에 의해 영향받는다면, 사법부는 존재 가치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법관의 재판상 독립은 ’다른 국가기관으로부터의 독립‘, ’사회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속행 중인 재판은 국회 국정감사 및 국정조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법관에 대한 탄핵은 그 이유가 ’직무상 의무위반과 법관으로서의 현저한 품위 손상‘으로 한정돼 있습니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양 극단으로 갈라서, 법관과 그 가족의 신상털기를 죄의식 없이 자행하는 우리 사회 현실을 고려할 때, ’사회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박용진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파기환송 취지는 경영권 승계 작업을 위한 뇌물과 부정한 청탁을 더 엄격하게 판단해 다시 공정하고 정의롭게 판결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파기심 판결 어디에도 이런 내용은 없습니다.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판결 취지마저 왜곡하는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범여권 국회의원들의 공동 기자회견은 팩트와 논리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비판이라 하기엔 팩트가 부실했고 궤변에 가까운 자의적 판단이 논리를 대신했습니다.

삼성준법감시위에 대한 생산적 비판, 삼성그룹 지배구조에 대한 합리적 대안을 담은 비판은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삼성의 경쟁력을 높이고 우리 대기업집단이 ’재벌’이란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등을 키우는 ‘비난’이 아니라 그것을 해소하는 비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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