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삼성 족쇄에 드리운 晩時之歎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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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삼성 족쇄에 드리운 晩時之歎 경제
  • 유경표 기자
  • 승인 2019.12.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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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위 '기업 옥죄기'로 경제 나락... 고통은 또 국민 몫인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시장경제DB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시장경제DB

글로벌 IT·전자업계는 ‘졸면 죽는’ 냉혹한 세계다. 치밀한 전략과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남들보다 한 발 앞서가지 않으면 금새 밀려나 잊혀지기 십상이다. 한 때 독보적 점유율로 전 세계를 영원히 호령할 것만 같았던 핀란드 휴대폰 제조사 노키아, 미국 필름회사 코닥, 그리고 '메이드 인 재팬'을 상징했던 소니와 도시바에 이르기까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왕좌’에서 밀려난 기업들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삼성전자는 ‘빠른 의사결정’과 ‘강력한 추진력’이 강점인 회사다. 1년이 마치 1초와도 같은 IT·전자업계에서 삼성전자가 경쟁사를 압도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오너 책임경영'을 구심점으로 한 신속한 의사결정을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신성장동력을 발굴하는 안목도 탁월했다. 故 이병철 선대 회장은 1938년 삼성상회 창업 후 설탕과 모직 생산으로 기반을 닦았고 1983년 그 유명한 ‘도쿄선언’을 계기로 반도체 분야까지 진출했다. 이병철 회장이 주변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반도체 사업은 오늘날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서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을 통해 삼성전자 체질을 근본적으로 혁신했다는 평을 듣는다. 철저한 품질관리로 제품 신뢰성을 높이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부터다. 1995년 3월 이건희 회장은 불량으로 판명된 애니콜 휴대폰과 팩시밀리 등 15만대를 전부 모아 불태우는 이른바 ‘애니콜 화형식’을 지시하기도 했다. 신뢰할 수 있는 제품으로 승부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애플 아이폰의 등장으로 글로벌 휴대폰 회사들이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이건희 회장은 2010년 ‘갤럭시S’ 시리즈를 성공시키며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특히, OLED 디스플레이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고 갤럭시 스마트폰에 탑재해 품질을 개선한 것은 ‘신의 한수’였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글로벌 중소형 OLED 시장에서 90%를 상회하는 독보적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갑작스런 와병으로 경영 전면에 부상했다. 이 부회장은 세계 최대 자동차 전장·오디오 기업인 하만을 인수하는 ‘빅딜’을 성사시키며 세계를 짬짝 놀라게 만들었다. 최근에는 미래 신성장동력 인공지능(AI), 자율주행, 5G, 바이오 등 분야에서 앞서나가기 위해 2021년까지 총 18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정치논리에 기댄 '기업 옥죄기'... 최종 피해자는 국민   

그러나 이 같은 막대한 투자규모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가까운 미래에 경쟁사들을 물리치고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5G, AI, 사물인터넷(IoT)과 금융이 결합하면서 지금까지는 상상 속에 그쳤던 새로운 신세계가 도래하고 있다. 

글로벌 M&A 시장에서도 각축전이 한창이다. 미국의 구글과 아마존, 중국의 텐센트, 일본의 소프트뱅크 등 IT 공룡 기업들은 혁신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스타트업 인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삼성 역시 글로벌 경영에 속도를 더해야 할 시기이지만, 대·내외적 악재가 발목을 잡고 있다.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이재용 부회장이 1년 가까운 시간을 야인으로 머물면서 삼성의 경영시계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초 복귀한 뒤 중국, 인도, 베트남 등 주요 사업 현장을 직접 챙기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지만 그것도 잠깐, 올해 8월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으로 다시 법정에 서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됐다. 

이 부회장이 사업과는 관계없는 정치적 현안에 휩쓸려 장기간 법정에 서야 하는 현실은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부정적 시그널을 준다. 컨트롤타워 부재도 안타깝다. 검찰은 이 부회장 관련 사건을 수사하면서 '그룹 미래전략실의 주도로', '그룹 차원에서 계획적인...' 등의 표현을 빌려, 삼성 전체를 범죄집단으로 묘사했다. 

특히 검찰은 이 과정에서 그룹 현안 및 계열사간 사업을 조율한 컨트롤타워 조직(구 미래전략실, 삼성전자 사업지원TF)을 범죄의 온상 내지 시발점으로 지목했다. 이들 조직 및 구성원에 대한 반복적인 압수수색과 소환조사, 기소 등도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다. 책임경영 강화와 독립성 제고를 위해 대표이사와 분리한 이사회도 의장이 법정구속되며 정상적인 이사회 운영에 심각한 공백이 생겼다.

그 결과 삼성은 '머리'없는 조직이 됐다. 경쟁사들은 결승선을 향해 뛰어가기 바쁜데, 삼성은 발걸음을 한 발짝 옮기기가 버거워 보인다.

16일부터 20일까지 삼성전자 경기 수원, 화성, 기흥 사업장에서는 하반기 글로벌 전략회의가 열렸다. 매년 6월과 12월 각각 한 차례씩 열리는 글로벌 전략회의는 그룹의 내년도 전략과 사업계획을 구체화하고 각각의 역할을 재확인하는 자리다. 내년 사업의 밑그림을 그리는 이 자리에 이 부회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년도 국내외 경기 전망에 대해 심상찮은 조짐이 보인다는 목소리가 많다. 투자와 소비가 줄고 고용은 둔화됐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 속에 수출 역시 장담하기 어렵다. 초대형 태풍이 시시각각 한반도를 향해 북상하고 있는데, 정작 지붕에는 비가 새고 대들보에는 금이 간 형국이다. 반기업 정서에 편승한 현 정부의 ‘기업 옥죄기’가 가뜩이나 허약한 우리 경제 체질을 더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쓴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글로벌 거대기업이 맞붙는 전쟁터에서 국가가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발목을 잡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초일류 기업의 반열에 올라가는 것은 어렵지만, 2류로 내려앉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때 가서 후회한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고통은 오롯이 국민의 몫으로 돌아올 뿐이다. 발목에 채운 족쇄를 풀어줘야 한걸음 내딛기라도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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