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보길의 역사 올레길] 고종에 "국회 만들라" 철야농성…이승만에 손 든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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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보길의 역사 올레길] 고종에 "국회 만들라" 철야농성…이승만에 손 든 황제
  • 인보길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
  • 승인 2016.06.2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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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이야기-'혁명의 문' 인화문

1960년 4.19 데모사태로 이승만은

▲ 20대 이승만 청년투사.

12년간의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하야(下野)했다. 

그후 1년 동안 한국은 데모 천국으로 변했다.
노동자들은 물론 온갖 집단들, 심지어 구두닦이들과
걸인들까지도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에 나섰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는
친북파 시위로 나라가 뒤죽박죽이 되어도
민주당 정권은 속수무책, 급기야
 5.16 군사쿠데타를 맞고 말았다.
유신독재 반대 데모, 5.18 광주 데모,
최근의 광우병 촛불데모에 이르기까지
‘데모 만능주의’에 빠져버린 대한민국.
 그 데모의 원조가 바로 구한말 이승만이 시작한 데모였다.
그때 누가 알았으랴. 시민 데모의 물결이 62년뒤
이승만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릴 줄이야!

▲ 4.19후 데모천국이 된 한국,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데모대.

◆입헌군주제 캠페인- 황제에게 ‘국회 설립’ 상소

1898년 10월 역사상 처음 데모로 정권교체를 얻어낸 독립협회 청년지도자 23세 이승만.
의기양양한 급진파 혁명아 이승만이 몸을 던진 데모의 하일라이트는
“국회(國會) 개설 요구” 데모였다.
 

“우리나라도 대영제국처럼 의회를 개설하여 근대 국가를 만들어보자”

“미개한 일본도 개화 혁명으로 국회를 열어 조선보다 강한 나라가 되지 않았느냐”

독립협회가 추진한 민권운동의 목표는 전제(專制)군주제를 입헌(立憲)군주제로 바꾸는 일이었다.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정치상에 가장 긴요함’이란 토론회를 계속 열고 독립신문에 논설을 연일 게재했다.
 "의회와 정부의 관계는 인체의 두뇌와 손발 같은 것"이라며
입헌군주제가 황제와 내각과 인민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주장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고종황제에게 정식으로 ‘의회 설립’을 제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도 한문전용의 오랜 관습을 깨고 역사상 최초로 국한문을 혼용한 것이었다.
 

미국식 의회제도를 꿈꾼 독립협회는 내각의 자문기관으로 유명무실한 중추원을
상원으로 개편하고 점차 하원까지 설립하자는 구상이었으나,
소외된 수구파는 보부상(褓負商)을 동원 ‘황국협회’를 급조하여 제동을 걸고 나섰다.
 

1898년 10월 28일 종로에서는 4천여명이 운집한 집회가 열렸다.
이것은 의회 개설을 위하여 독립협회가 개최한 최초의 관민공동회(만민공동회와
정부관료 합동집회)로서 총리급인 박정양등 대신들까지 모두 참석한
 ‘거리의 관민합동 정치무대’나 다름 없었다.

▲ 종로 네거리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태극기가 날리고 있다.

◆천민 ‘백정’의 연설...<헌의 6조> 만장일치 채택

과격한 시민의 열기를 무마하려는 대신의 연설이 끝난 뒤
머뭇거리는 군중 속에서 박성춘(朴成春)이라는 천민 백정(白丁)이 뛰쳐나왔다.
대신들 앞에 백정이 나서서 연설한다는 것은 그때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국애국의 길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원컨대 관민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대를 누리게 합시다.”

4년전 갑오개혁(1894)때 천민신분에서 해방된 백정의 연설에 군중의 환호는 하늘을 찔렀다.
애국운동에는 신분의 차이도 없을뿐더러 이제 천민도 당당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이날 집회에서 유명한 ‘헌의6조(獻議六條)’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주요 내용은 황권 강화, 외국에 이권양여 규제, 세금 일원화, 예산의 공개,
 새 법률 즉각 실시등이다. 대신들도 전원 찬성했다.

10월31일 새벽, 고종황제는 ‘헌의6조’를 공포했다.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려 했다.

그때 이승만이 나섰다.
 “해산하면 안됩니다. 여태까지 황제의 조칙이 내려도 실시되는 걸 보지 못했으니
그 실천을 볼 때까지 기다립시다.” 흩어지려던 군중은 이승만의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날부터 나흘간 이승만은 집회를 계속하면서 ‘헌의6조’를 하루 속히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이승만은 이처럼 시민운동의 선동가로 확고한 리더십을 보이고 있었다.

▲ 대한제국의 정궁이 된 경운궁의 정문 인화문(仁化門). 대한문과 달리 남쪽에 있다가 일본 손에 헐렸다.

◆수구파의 반격...고종 황제의 배신

11월4일 드디어 중추원의 새로운 관제가 공포되었다.
한반도 유사이래 최초로 국민대표가 국정에 참가하는
근대적 입법기관이 탄생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수구파가 좌시할 리 없었다.
바로 그날 밤 수구파는 독립협회를 모함하는 삐라를 시내 곳곳에 붙였다.
개화파 박정양과 독립협회장 윤치호가 대통령-부통령이 되어 황제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우려한다는 중상모략 악선전이었다. 
 

그동안 전전긍긍하던 황제 고종은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독립협회 간부 일제 검거령을 내렸다.
‘헌의6조’에 찬성한 대신들을 파면하고 독립협회등 민간단체들을 해산시켰다.
수구파 조병식은 독립협회 간부 20명을 체포, 즉각 사형시키려 했으나
회장 윤치호가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집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멈추었다.
 

▲ 독립협회장 윤치호.

고종의 배신에 분노한 윤치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어떤 비겁자라도
대한의 황제보다 더 천박한 일은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부는 친일 노예 유기환과 친러 노비 조병식의 수중에 있다.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이 여기에 개입해서 모종의 알짜 이권을 위하여
노예들을 지원하고 있으니...”

출발부터 반격에 걸린 ‘입헌군주제’ 개혁운동,
그러나 한번 불 붙은 민중의 열풍은 이날부터
 ‘피의 투쟁’을 향해 질풍노도와 같이 타오른다. <계속>

[2015.01.26 16:5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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