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50> 세종대왕 승하와 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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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과 왕실의학] <50> 세종대왕 승하와 중풍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9.1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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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SBS 뿌리깊은나무 방송 캡쳐

“임금이 영응대군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훙(薨)하셨다.” <세종 32년 2월 17일>

세종이 32년 2월 17일 영응대군 집 동편의 별궁에서 승하했다. 태조 6년인 1397년 경복궁 서쪽의 잠저에서 태어난 왕은 태종 18년(1418)에 양위를 받아 등극했다. 재위 기간은 32년이다. 수(壽)는 53세였다. 실록의 승하 기사에는 세종 삶의 핵심이 담겨 있다. 

“매일 이른 새벽에 면 옷을 입으시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으시고, 다음에 정사를 보시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시고, 다음 경연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게으르지 않으셨다.”

매사에 성심을 다하고, 정사에 몰두했음을 읽을 수 있다. 집현전 설치, 과학 발달, 군사력 증강, 문학 융성, 농업 발달, 의학과 농업 선진화 등 많은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왕은 백성의 통곡 속에 여주 영릉에 안장됐다.

뭇 백성을 비탄에 빠지게 한 세종의 사인은 무엇일까. 세종은 당뇨, 안질, 풍병, 견통, 가슴 떨림, 수족불편 등의 지병을 앓았다. 특히 말년에는 보행 장애와 언어장애도 있었다. 다양한 질환 중에서도 직접 사인은 승하 100일 전의 임금 말씀에서 유추할 수 있다. 

"나의 안질(眼疾)은 이미 나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던 것도 조금 가벼워졌다. 오른쪽 다리의 병도 차도가 있다. 이는 경들이 잘 알고 있다. 근자에는 왼쪽 다리도 불편하다. 기거할 때면 반드시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한다. 마음에 생각하는 게 있어도 반드시 놀라고 두려워서 가슴이 몹시 두근거린다.“ <세종 31년 12월 3일>

임금은 언어장애, 수족장애, 기억장애, 불안증세를 이야기했다. 이는 혈색이 흐리고 눈이 어두워지는 간허(肝虛), 기혈이 약한 심허(心虛), 혀가 굳는 건삽증(蹇澁症) 표현으로 심혈관계 전조질환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세종은 한 달 후인 32년 1월 22일에 건강이 악화돼 효령대군 집으로 이어하고, 승려와 대신들은 절과 명산대천에서 임금의 쾌차를 빌었다. 다음 달인 윤1월 2일에는 임금의 병이 호전되었고, 2월 4일에는 거처를 영응대군 집으로 옮겼다. 그러나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중풍은 왕실 내력이다. 증조부인 태조가 중풍으로 쓰러진지 4개월 만에 승하했고, 백부인 정종과 아버지인 태종도 중풍이 지병이었다. 당뇨로 오랜 기간 고생한 세종은 집안 유전적으로 중풍에 취약했고, 결정적 사인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중풍은 가족력과 밀접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중풍 가족력이 있는 사람 10명 중 3.6명꼴로 중풍 인자인 고지혈증을 보유하고 있다. 수검자 중 35.85%가 1개 이상의 이상지질 혈증 인자를 갖고 있고, 전체 환자 가운데 19.68%는 고콜레스테롤혈증을 보인다.

중풍은 뇌졸중, 신경계 질환, 감염질환을 포함한다. 중풍은 화열증(火熱證), 기허증(氣虛證), 음허증(陰虛證), 습담증(濕痰證)이 단독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다. 중풍에는 양격산화탕, 청폐사간탕, 용뇌소합원, 우황청심환, 성향정기산, 소속명탕 등을 처방한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로 대한황실문화원 황실의학 전문위원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몸을 보(保)하고, 체중을 감(減)한다’는 한의관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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