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39> 난임 치료와 영해군 쌍둥이 논란
상태바
[세종실록과 왕실의학] <39> 난임 치료와 영해군 쌍둥이 논란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7.05 18: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Jtbc 드라마 인수대비 캡쳐

“경상도 장기현에 사는  구원길의  아내가 한 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임금이 쌀을 주게 하였다.” <세종 8년 6월 29일>

인구는 국가경쟁력이다. 나라를 지키고, 세금을 걷는 기초 자원이 사람이다. 고대로 갈수록 전쟁 포로 확보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승전국은 포로를 경제적, 정치적 도약을 위한 디딤돌로 활용했다. 전쟁이 없던 사회에서는 내부에서 인력을 충원해야 한다. 출산을 적극 장려했다. 한 번에 여러 명을 출산하면 상서로운 일로 여겼다.

삼둥이 이상이 태어나면 이례적인 일로 기록하고, 나라에서 양육비 지원을 했다. 우리나라 다둥이 최고는 다섯쌍둥이다. 신라 별휴왕 10년(193)에 경주에 사는 여인이 4남 1녀를 낳았다. 다섯쌍둥이는 단 한 번이지만 네쌍둥이는 통일신라에서 3회, 조선에서 5회 등 8차례가 보인다. 세 쌍둥이는 비교적 흔해 조선의 기록에서만 151회를 찾을 수 있다.

다둥이 장려금은 고대로 갈수록 많았다. 통일신라의 문무왕은 한지부(漢岐部)에 사는 여종이 3남 1녀를 생산하자 200석의 곡식을 선물했다. 200석을 현대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대략 4천만 원 이상의 거액이다. 이 돈은 당시 여인이 평생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고액이다. 이 여인보다 800여 년 후대인 조선 세종 때 종9품 관리가 한 해에 받는 곡식이 쌀과 콩을 합해 10석에 불과했다. 세종 시대의 공무원도 20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아야 모을 수 있는 금액이다.

조선은 셋 이상의 다둥이를 낳은 가족에게는 종9품 공무원 연봉에 해당하는 쌀과 콩 10석을 지원했다. 세종은 13년(1431) 7월 5일 신하들과 다둥이의 정의와 지원에 대해 논의한다. 토론은 경상도 초계군에 사는 사노비 약비의 출산으로 시작된다. 약비는 삼형제를 낳았는데 두 아이가 바로 죽고, 한 명만 살았다.

먼저, 다둥이의 경제 지원범위가 논의됐다. 승지는 ‘한 태(胎)에서 세 아들을 낳은 여인에게는 쌀 열 섬을 준다’는 관례를 보고한다. 지원은 쌀과 콩, 또는 쌀만 주는 것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10석은 불문율임을 알 수 있다.

다음, 다둥이의 정의다. 다둥이는 둘 이상의 쌍둥이다. 조선에서 가정경제를 지원하는 다둥이는 삼둥이 이상이다. 문제는 다둥이 정의를 출산으로 보는가, 생존으로 보는가이다. 약비의 세 아들 중 한 명만 살았다. 이에 승지는 다둥이가 아닌 독자로 보았다. 지원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종은 정확한 규정 대신 정(情)의 논리를 편다. “옛 사람이 말했다. 한 태에 세 아들을 낳으면 현재(賢材)가 많다. 이 여자는 두 아들을 잃었지만 쌀을 주는 것이 옳다." 다둥이로도, 독자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는 발언 뒤, 다둥이는 즉 훌륭한 인재라는 등식으로 도입한다. 따라서 나라의 지원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동부대언 안숭선은 전례 없음을 들어 반대한다. 신하들은 생존자 기준으로 다둥이를 판단했다. 임금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건을 예조로 내려 보낸다. 예조는 절충안을 올렸다. “반을 감하여 닷 섬만 주는 것이 옳습니다."

실록에는 서민의 다둥이 출산은 많은 데 비해, 양반 지배층과 왕실의 사례는 아예 없다. 양반 인구는 조선 전기에는 10% 선이고 후기에는 40% 가까이 올라간다. 인공의술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 조건에서의 쌍둥이 출산 확률은 0.3% 내외다. 1천명의 산모 당 3명꼴로 다둥이를 낳는다. 이를 감안하면 양반은 의도적으로, 또는 구태여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반면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던 서민은 적극적으로 신고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실은 쌍둥이 출생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왕자와 공주, 옹주는 약 300명이다. 자연 조건의 확률로 보면 쌍둥이가 없는 게 이상하지 않다. 자연 조건에서의 쌍둥이는 300~400명 당 1명꼴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종과 신빈김씨 소생인 영해군의 쌍둥이설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근거는 세종 왕자들의 태실이다. 성주 태실에는 세종의 18왕자 중 17왕자와 손자 단종 등 총 19기의 태실이 있다. 왕실족보인 선원록에 의하면 세종의 소생은 18남 4녀다. 성주에는 18남 중 문종의 태실이 모셔지지 않았다. 따라서 성주 태실은 단종을 포함해 18기여야 한다.

그런데 19기의 태실이 존재한다. 논란은 마지막에 모셔진 당(瑭) 왕자의 태실이다. 그동안 전주이씨대동종약원과 세종 후손들은 태실의 장(璋) 왕자와 당(瑭) 왕자를 모두 영해군으로 보았다. 왕실족보인 선원록의 구남영해군당일작장(九男寧海君瑭一作璋)과 선원보의 구남영해군당초명장(九男寧海君瑭初名璋)이 근거다. 영해군의 이름은 ‘장’과 ‘당’ 두 개다. 영해군의 태실은 첫 이름인 장으로 먼저 만든 뒤, 개명 후 다시 설치한 것으로 이해됐다. 이를 일부에서는 영해군이 장과 당이 두 사람인 쌍둥이로 풀이하는 것이다. 또 성주군에서는 태지석에 음각된 출생일을 근거로 쌍둥이가 아닌 몇 년 차이의 형제로 본다. ‘장’ 왕자는 영해군으로, ‘당’ 왕자는 세종이 마지막에 낳았으나 족보에 기록되지 않은 19번째 왕자로 유추한다. 하지만 쌍둥이설과 제19왕자설은 극히 일부의 소수설이다.

전통시대와는 달리 현대는 다둥이 전성시대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1만 5천여 건의 쌍둥이가 태어난다. 스트레스, 만혼 등으로 난임이 늘면서 인공수정과 시험관 아기 출산이 증가한 게 큰 원인이다. 인공 수정 등은 수정확률을 높이는 게 관건이다. 여러 개의 난자 배란을 유도하고, 다수의 수정란을 이식한다. 결과적으로 쌍둥이 출생 비율이 높아진다.

한의학에서는 난임의 많은 원인은 허약(虛弱)성으로 보았다. 영양불량 지속으로 자궁의 성숙도가 낮고, 혈액공급이 부족하면 임신과 출산이 어렵기 때문이다. 또 기혈허약(氣血虛弱) 신허(腎虛)와 함께 간울(肝鬱) 어혈(瘀血) 습담(濕痰)도 임신과 깊은 연관으로 파악했다.
요즘에는 배란장애 외에 착상에도 주목을 많이 한다. 현대인은 착상 실패로 불임되는 비율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주 원인은 자궁의 어혈과 비대, 자궁의 허냉, 빈혈 등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임신의 어려움 원인을 월경 불순, 혈 부족, 정액 미약으로 들었다. 이는 자궁의 건강상태를 높이고, 보혈(補血)로 자궁 순환을 좋게 하면 개선된다. 또 정액의 생명력을 높이는 처방이 필요하다. 양기 처방에는 고본건양단, 오자연종환 등 다양한 탕약이 활용된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로 대한황실문화원 황실의학 전문위원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몸을 보(保)하고, 체중을 감(減)한다’는 한의관을 전파하고 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