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32> 만성피로증후군과 임금의 허손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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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과 왕실의학] <32> 만성피로증후군과 임금의 허손증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5.3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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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임금이 허손병(虛損病)을 앓은 지 여러 달이다.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서 육찬(肉饌)을 두세 번 청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셨다. 병세는 점점 깊어 약의 효험이 없었다.” <세종 4년 11월 1일>

조선의 지향점은 유교국가 실현이다. 유교의 핵심가치는 효(孝)다. 효가 자연스럽게 충(忠)으로 확장된다. 유교사회의 왕은 효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이를 통해 백성과 관료도 효와 충의 삶으로 이끈다. 효는 산 부모에게나, 죽은 부모에게나 정성과 행위가 똑같아야 한다. 유교에서 제사에 신경 쓰는 배경이다. 부모를 여윈 자식은 죄인이다. 세종 4년 5월 10일, 태종이 승하했다. 지극한 슬픔에 빠진 세종은 상중(喪中)의 의례인 상례(喪禮)에 집착했다. 상식을 올리고, 곡하고, 감선하는 등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인의 삶을 살았다. 

옥체는 점점 약해졌다. 태종 승하 6개월이 지난 11월 1일, 신하들은 임금의 건강상태를 심각하게 여기게 된다. 영양결핍과 과로, 지극한 슬픔이 겹친 허손병(虛損病)으로 판단한다. 여러 달 진행된 병이 계속 악화되는 것을 우려한다. 유정현, 이원, 정탁 등은 여러 당상관들과 함께 나라의 안위를 거론하며 임금에게 육식을 거듭 청한다. 

“전하께서는 상례의 원칙만 굳게 지키십니다. 병환이 더 깊어져 정사(政事)를 보지 못하시면 나라와 백성에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자는 아직 어리십니다.”

신하들이 육식을 청한 것은 임금이 상중에 고기를 물리쳤기 때문이다. 세종은 고기반찬이 없는 식사인 감선(減膳)을 했다. 또 지극한 슬픔 속에서도 나랏일을 계속했다. 이 같은 생활이 지속되자 비대했던 몸은 마르고,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면역력 저하와 지속적 피로는 허손증으로 악화됐다. 기력이 쇠해 약이 듣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신하들은 태종의 유교(遺敎)까지 거론하며 고기반찬으로 체력을 보할 것을 청한다. “태종은 말씀하셨습니다. ‘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 권도(權道)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 권도는 상황에 맞게 하는 응급조치나 임시방편, 유연성 있는 행동이다. 태종은 아들이 지나치게 상례에 얽매여 건강을 잃을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신하들의 계속된 요청에 임금은 수라에 육즙이 포함되는 것은 허락한다.

허손(虛損)은 진기(眞氣) 소진, 불규칙 섭생과 생활, 신정(腎精) 과다소모로 인한 기력저하와 극심한 피로가 원인이다. 세종은 아버지 상을 당하여 고기 없는 가벼운 식사를 여러 달 하면서 정사를 보고, 정신적인 큰 슬픔으로 정기(正氣)와 기혈(氣血)이 허약해졌다. 허손의 증상은 식은 땀, 어지럼증, 소화불량, 체중감고, 의욕상실, 불면, 불안, 기침, 가래, 우울, 전신통증, 식욕저하, 유정(遺精), 조열(潮熱) 등이다. 만성피로증후군과 결핵, 빈혈, 신경쇠약이 보인다.  

황제내경에서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로 인한 원기 부족으로 설명한다. 음식물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면 기가 부족해 상초(上焦)와 하완(下脘)의 기능이 떨어진다. 이는 위(胃)의 열을 발생시키게 된다.

치료는 각 장기의 허실을 살펴서 기(氣), 혈(血), 음(陰), 양(陽)을 고루 균형 있게 보해야 한다. 동의보감에서는 허손의 처방으로 구선왕도고(九仙王道糕), 녹용대보탕(鹿茸大補湯), 당귀고(當歸膏), 침향별갑산(沈香鱉甲散) 등을 들고 있다. 또 회향오약환(茴香烏藥丸), 위령선탕(威靈仙湯), 보익자금환(補益紫金丸), 골쇄보환(骨碎補丸) 등도 효과적이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로 대한황실문화원 황실의학 전문위원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몸을 보(保)하고, 체중을 감(減)한다’는 한의관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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