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28> 태종과 어의의 오진 논란, 세종의 주역점
상태바
[세종실록과 왕실의학] <28> 태종과 어의의 오진 논란, 세종의 주역점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5.09 10: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어의들이 처방한 인삼순기산은 중풍(中風)에 쓴다. 기(氣)가 허(虛)하여 입이 비뚤어지고, 근육이 뒤틀림과 마비, 목의 뻣뻣함, 언어가 어눌할 때 효과적이다. 약재로는 기를 보하는 열을 내는 진피, 백지, 인삼, 갈근, 길경, 후박, 천궁, 마황 등이 포함된다.

태종 18년 1월 26일, 조선 왕실은 비상이 걸렸다. 원경왕후의 막내왕자인 성녕대군이 완두창으로 위독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성억을 흥덕사로 보내 정근(精勤)하게 했다. 정근은 승려나 무당이 정성으로 비는 것이다. 또 김용기에게는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원 글인 구병원장을 써 절령 나한전에서 빌도록 했다. 맹인 점쟁이들에게는 왕자의 길흉(吉凶)을 묻게 했다. 이때 정탁은 주역점을 쳐 태종에게 올렸다. 이를 충녕대군이 시원하게 풀이하자 세자와 신하들이 감탄한다.

이날의 일련 행위는 조선 초의 의료실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염병인 완두창으로 위험한 지경에 빠진 왕자를 구하는 방법으로 의사의 처방을 포함하여 무당, 점쟁이, 주역철학이 공존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자연의 힘에 크게 의지했던 고대에는 무당이 의사의 역할을 했다.

의술이나 의사를 뜻하는 의(醫)의 받침이 원래는 유(酉)가 아닌 무(巫)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한나라 무제를 비롯한 고대 중국의 황제도 병이 나면 무당에게 의지했다. 우리나라도 비슷했다. 무당과 민간의술에게 의지하던 치료행위는 삼국시대부터 불교의학 및 부처에게 비는 행위의 비중이 높아진다.

조선전기에는 의학이 진일보했으나 전염병인 완두창 치료에는 한계가 있었다. 병의 예후를 무당과 점쟁이, 승려에게 의지해 판단했다. 유학자들은 주역으로 길흉화복을 점쳤다. 세종인 충녕대군이 주역점을 풀이한 것도 과학적 의학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왕실에서 미신적 의료행위가 펼쳐진 것은 당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절박함과 함께 어의(御醫)의 공부 부족도 이유다. 충녕대군은 밤낮으로 동생인 성녕대군 병실을 지켰다. 의원인 원학과 의서를 연구하며 친히 약을 처방해 치료를 시도했다. 충녕대군은 의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서를 연구해 대책을 내놨다. 이는 어의를 신뢰하지 못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성녕대군이 죽은 뒤 어의의 오진 여부가 도마에 오른다. 태종은 어의들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먼저, 갑작스럽게 숨진 세종의 누이인 경안공주의 진단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공주의 증세는 고열, 심한 괴로움, 손의 뒤틀림 등이었다. 어의 양홍달은 “의가에서는 아직 알지 못하는 병”이라며 정기산(正氣散)을 올렸다. 정기산은 위장을 바로잡고 음식이 체한 것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진단과 처방에 의문을 품은 태종은 직접 의학서적을 본 뒤 손의 뒤틀림은 발열의 결과이고, 보약(補藥)은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다음, 성녕대군도 오진으로 확신한다. 성녕대군은 완두창이 발병한 첫날에 허리와 등의 통증을 호소했다. 이때 어의들은 풍증(風症)으로 판단해 인삼순기산으로 땀을 흘리게 했다. 

태종은 의서의 완두창인 창진(瘡疹)에서 ‘두통에 땀을 흘리게 하면 사는 경우는 하나이고, 죽는 경우는 열이다’는 내용을 확인한 뒤 의사의 오진을 알게 된다. 성녕대군이 위독한 날에는 얼굴이 회백색이 되었다. 그런데 어의는 안색을 호전되는 것으로 믿고, 약을 쓰지 않았다.

어의들이 처방한 인삼순기산은 중풍(中風)에 쓴다. 기(氣)가 허(虛)하여 입이 비뚤어지고, 근육이 뒤틀림과 마비, 목의 뻣뻣함, 언어가 어눌할 때 효과적이다. 

약재로는 기를 보하는 열을 내는 진피, 백지, 인삼, 갈근, 길경, 후박, 천궁, 마황 등이 포함된다. 전염병인 완두창은 음액(陰液)이 마르고 건조한 상태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이다. 따라서 땀을 흘리게 하는 것은 몸을 더욱 건조하게 해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완두창을 삼두음(三豆飮), 희두방(稀痘方) 등의 복용으로 예방을 꾀했다. 또 발병하면 격리조치와 특수 조제약물로 씻고, 음식을 엄격히 관리했다. 정조 때는 정약용이 완두창 예방접종을 시행했다. 완두창을 앓은 사람에게서 두즙(痘汁)을 취하여 인체에 불어넣는 방법이다.

태종은 성녕대군의 죽음 후 의료체계를 점검해 미신적 행위를 중단시킨다. 둔갑술 치료법인 총지종(摠持宗)의 국가적 지원을 중단하고, 맹인과 무녀의 의료행위도 금지했다. 세종은 후진적인 의학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향약집성방 등 다양한 의학서적 출간을 포함한 의사의 질 고양을 위한 대책을 마련한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로 대한황실문화원 황실의학 전문위원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몸을 보(保)하고, 체중을 감(減)한다’는 한의관을 전파하고 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