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25> 세종의 경로정책과 장수 식치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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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과 왕실의학] <25> 세종의 경로정책과 장수 식치요법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4.2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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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세종 때 노인이 많은 이유는 사회적 우대와 함께 위생이 좋아진 결과로 풀이할 수 있다. =SBS 드라마 '장옥정' 캡쳐화면

“고봉현의 덕수원에 1백7세의 노인이 살고 있었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 옷과 양식을 하사했다. 병으로 누워있던 노인이 은명에 감격했다. 노인이 손을 마주 잡고 옷을 몸 위에 덮더니, 조금 후에 죽었다.” <세종 2년 4월 26일>
  
세종은 노인을 예우했다. 107세 노인에게 특별히 은전을 베푼 왕은 경로우대를 제도화했다. 고령자를 존중할 때 건전한 사회기풍이 형성됨을 염두에 둔 조치다. 90세 이상 노인에게 관직과 봉작을 했다. 천인은 90세 이상이 되면 쌀을 2석씩 내리고, 1백세가 되면 면천을 시켰다. 또 남자에게는 7품의 벼슬을 주고, 여자에게는 봉작(封爵)을 했다. 
  
또 80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경로잔치를 했다. 양로연에는 양반, 평민, 천민이 모두 참여했다. 양로연은 노인의 편익을 최대한 살폈다. 노인이 왕에게 큰절을 하지 말도록 했다. 음식과 술을 넉넉히 제공해 마음껏 마시고 즐기게 했다. 그렇기에 잔치가 무르익으면 춤추는 할머니, 시 짓는 할아버지도 눈에 띄었다. 
  
세종시대에 노인 복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은 경로잔치에 참여한 89세 노인 이귀령이 임금에게 한 말에서 확인된다. 
  
“비로소 양로(養老)의 예(禮)를 일으켜서 노인을 우대하시니 심히 거룩한 일이옵니다. 또 예악(禮樂)을 제작하여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이 밝게 갖추었으니 신이 더욱 기뻐하고 경축하옵니다. 신은 나이가 이미 늙어 보답할 길이 없사옵니다. 다만 성수(聖壽)의 만년을 축수하고, 또 신의 나이로 성상의 수(壽)를 기약하옵니다." <세종 16년 8월 22일>
  
노인이 살기 좋은 세상에는 고령자가 많다. 세종 17년에 90세 이상의 인구를 조사한 결과 전라도, 경상도, 함길도, 황해도에 614명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에 100세 이상은 남자 3명, 여자 7명 등 모두 10명이었다. 이는 전국의 8개도 중 4개도의 통계다. 따라서 세종 때의 100세 이상 노인은 20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당시 인구는 500만~700만으로 볼 수 있다. 

세종 32년 1월 15일 양성지는 임금에게 명나라 태조의 말을 인용해 보고한다. “네 나라는 동서가 1천 4, 5백 리에 남북이 1천 2, 3백 리다. 가구는 약 70만 호(戶)이고, 호(戶)마다 3명의 장정이 나오면 무릇 2백 10여만 명이 될 것이다.” 조선 초의 가구당 인구는 7~10명으로 점쳐진다. 이를 환산하면 500만~700만 인구 중 20명이 100세 이상이라는 의미다.
  
세종 때 노인이 많은 이유는 사회적 우대와 함께 위생이 좋아진 결과로 풀이할 수 있다. 조선건국은 고려 말의 잦은 전쟁을 멈추게 했고, 전쟁으로 인한 전염병이 줄었다. 특히 세종 때는 의방유취, 향약집성방 등 각종 의학 서적이 편찬돼 의료수준이 진일보했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로 대한황실문화원 황실의학 전문위원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몸을 보(保)하고, 체중을 감(減)한다’는 한의관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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