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22> 정소공주의 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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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과 왕실의학] <22> 정소공주의 태교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4.1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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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태교는 임부(姙婦)가 행동, 언어, 음식 등 생활 전면을 방정(方正)히 하여 태아(胎兒)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픽사베이

"애처로운 현철한 아가씨여! 일찍부터 태교(胎敎)를 받으시어 덕과 용모가 뛰어나셨네. 능히 삼가하고 효도하셨네. 천도가 창망(蒼茫)하여 어느덧 유명을 달리 하셨네.“ 

세종의 맏딸인 정소공주의 묘지명 일부다. 정소공주는 13세에 세상을 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딸을 잃은 세종은 나랏일을 돌보지 못할 정도로 비통해 한다. 정소공주는 태종에게 첫 손녀, 세종에게 첫딸인 정소공주는 왕실의 귀염둥이다. 태종은 수시로 안고, 어르고, 달랬다. 세종은 친히 글을 가르쳤다. 왕실의 사랑의 아이콘인 정소공주 장례는 공신과 당상관들이 성문 밖에까지 나가 눈물 흘릴 정도로 극진했다.

제학 윤회는 세종 6년 3월 23일에 왕녀묘지명(王女墓誌銘)을 지어 못다 핀 공주를 기렸다. 

“공주는 나면서부터 현숙하고 완순(婉順)하며, 자태와 용모가 단정하고 개결(介潔)하셨다. 유난히 총명하고, 슬기로우셨다. 자라서는 장중(莊重)하고, 말이 적고, 즐거워하고 성냄이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으셨다. 임금과 중전께서 사랑이 지극히 깊으셨다.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모두 공경하고, 우러러보았다. 공주는 엄숙하면서 화목한 행실이 있어 길이 귀척(貴戚)들의 의범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결혼도 하기 전에 양궁(兩宮)에게 슬픔을 끼치셨다. 진실로 천도(天道)란 알 수 없는 것인가. 아아, 슬프도다."

세종에게 지극한 슬픔은 안긴 공주는 태교를 받고 태어났다. 문헌상으로는 조선왕실 가족 중에서 최초로 태교를 받았다. 왕녀묘지명에는 덕이 깊고 용모가 빼어남을 태교 덕분으로 묘사돼 있다.

태교는 임부(姙婦)가 행동, 언어, 음식 등 생활 전면을 방정(方正)히 하여 태아(胎兒)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태교는 예부터 우리나라와 중국의 왕실, 사대부에게서 행해졌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태교가 시작된 것으로 조선 세종 무렵부터다.

이 시기에는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의 의학 서적이 편찬된다. 의서에는 중국 송나라 진자명이 부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에서 소개한 태교 내용이 설명된다.

세종의 둘째 며느리인 세조비 정희왕후도 태교의 주인공이다. 세조는 정희왕후를 높이 평가하면서 태교를 이야기 했다. “어질고 덕이 있다. 내정(內政)을 잘 닦고 외화(外化)를 도왔다. 집과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자손을 보전하게 했다. 이는 사실 태교(胎敎)에서 비롯되었다.” <세조 2년 7월 23일>

중국 궁궐에서도 태교가 성행했다. 조선 태종은 명나라 영락제의 황후가 숨지자 이조판서 남재를 조문 사절대표로 파견한다. 사절단이 휴대한 글에는 황후가 태교를 해 태자를 낳았음이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세종 시대의 태교는 어땠을까. 세종 때 지은 태산요록(胎産要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당나라의 의학전서인 천금방(千金方) 등 15종의 의학서를 참고한 태산요록은 임신과 육아의 질병치료 20여 항목을 다루고 있다.

태산요록에서는 태교의 중요성을 임신 3개월에서 찾고 있다. 이 무렵의 태아는 환경에 영향 받기 시작하는 데 아직 성품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권유한다.

“현인군자 등을 뵙고, 좋은 향을 피우고, 시경과 서경을 읽는다. 숙소는 깔끔하게 하고, 반듯하게 잘린 것을 먹고, 반듯한 자리에 앉는다. 음악을 즐기고, 좋지 않은 소리를 듣지 말고, 좋지 않은 일을 보지 않는다.”<태산요록의 태교론>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의 태교는 조선 후기와는 달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헌왕후는 정소공주와 문종, 세조, 안평대군을 사가에서 낳았다. 왕실의 엄격한 태교가 아닌 민가의 태교를 한 것이다. 경복궁에서 출산한 다른 왕자들도 전례에 비추어 조선 중후기의 왕비처럼 엄격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 택일 등의 번거움은 없고, 임신 후 조심하고, 관리하는 태교로 보인다. 

이에 비해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왕실에서는 계획임신을 한다. 제조상궁과 관상감이 협의로 정한 길일에 왕과 왕비가 합궁을 한다. 좋은 날이어도 경건하지 못한 주변 상황이 발생하면 날을 다시 잡는다. 천둥, 심한 안개, 심한 바람, 일식, 월식, 동지, 하지, 초하루, 보름, 그믐, 질병 등이 변수가 된다. 또 왕비의 잉태가 확인되는 순간부터는 섭생, 생각, 운동 등의 통합관리 속의 태교가 시작된다.

왕비의 거처는 태교의 장으로 변한다. 출입하는 사람이 제한되고, 왕비는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소리만을 듣는다. 잔잔한 음악을 듣고, 평화로운 그림을 감상하고, 좋은 글귀를 읽고, 십장생 등의 자수를 통해 마음을 정갈하게 한다. 사서삼경 읽는 소리도 듣는다. 태어날 왕손에게 입힐 옷도 만든다. 섭생은 음양오행 원리에 따라 행했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로 대한황실문화원 황실의학 전문위원이다. 창덕궁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몸을 보(保)하고, 체중을 감(減)한다’는 한의관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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