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9> 세종대왕의 약주와 풍습(風濕) - 시장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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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과 왕실의학] <9> 세종대왕의 약주와 풍습(風濕)
2018년은 세종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 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 픽사베이

"주상께서 한재(旱災)를 근심하여 술을 드시지 않습니다. 전하의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술은 풍랭(風冷)을 치료하고 기맥을 통하게 합니다. 한재(旱災)가 있다고 술을 삼가 하시면 성체(聖體)에 병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세종 8년 4월 16일>

그러나 임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오늘의 단비를 상서롭게 생각하기 보다는 그동안 내리지 않은 비를 재변(災變)으로 여긴 탓이다. 임금은 신하들의 약주 권유에도 손을 내저었다. 왕실과 민간에서는 한두 잔 술을 질환 예방 차원으로 활용했다.

최주리 한의사

세종 8년 봄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았다. 가뭄이 심해 농사에 지장에 있었다. 세종은 근신하는 마음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마침 4월 16일 비가 내려 마른 대지를 적시었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단비를 하례(賀禮)했다.

임금은 말했다. “나는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마신다 해도 한두 잔에 불과하다. 지금은 몸이 아프지도 않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병이 생기겠는가. 그래도 약용으로 술이 필요하면 염탕(鹽湯)을 마시겠다.” 염탕은 소금 끓인 물이다. 주로 종기 등의 해독에 쓰인다.

신하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술로 혈액순환을 강화하지 않으면 몸이 약해질 수도 있음을 주장했다. “술을 드시지 않으면 아침저녁으로 풍습(風濕)의 독기가 몸에 맞아 병으로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약용으로 한두 잔 드시는 것입니다. 술을 흠뻑 마시어 근심과 걱정을 잊으시라는 게 아닙니다."

임금은 신하의 정성을 어루만지며 결론을 내렸다. “그대들은 내가 예전에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앓았음을 생각한 것이다. 그 때에는 음식에서 선(膳)을 반이나 줄인 탓에 몸이 약해진 것이다. 지금은 술만 마시지 않는데 병이 생기겠는가. 다른 사람에게는 금주를 명하고 임금만 마시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옛사람은 병이 나거나 허약할 때 약간의 술을 약으로 생각하고 마셨다. 또 약 복용 때 약간의 술을 곁들이기도 했다. 12세에 왕이 된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상례로 지쳤다. 이에 영양식인 타락죽과 소주로 몸을 추스른다. 술을 원기회복의 약으로 쓴 것이다. 

음주를 즐기지 않는 세종에게 술은 달갑지 않았다. 약용으로 가볍게 마시는 정도였고, 그것도 내켜하지 않았다. 혈액순환으로 마시는 술을 소금물로 대신하곤 했다. 세종은 4년에 독감에 걸렸다. 때마침 연일 비가 내렸다. 습한 기운이 대궐에 가득했다. 도성 사람들의 건강에 적신호가 울렸다. 신하들은 임금에게 혈액순환을 좋게 하는 소주를 올렸다. 이에 대해 임금은 “술은 내 체질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계속된 신하들의 간청에 반잔을 마시고 내려놨다.

그렇다면 세종은 술을 아예 못 마셨을까. 그것은 아니다. 세종은 뛰어난 업무 능력과 함께 주량도 갖추었기에 왕이 될 수 있었다.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대권 후보는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으로 좁혀졌다. 그런데 태종은 후계자로 둘째왕자 효령대군이 아닌 셋째왕자 충녕대군을 낙점한다. 그 이유를 태종은 술로 설명한다.
  
“주인이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면 중국 사신과 어찌 즐거운 분위기의 대화를 하겠는가. 충녕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효령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다. 충녕이 보위를 맡을 만하다. 충녕으로 세자를 정하겠다.”<태종 18년 6월 13일>
  
세종은 술 마실 능력은 있었으나 좋아하지 않은 것이다. 선천적으로 마시지 못하는 체질은 아니었다. 임금은 신라가 포석정에서 패하고, 백제가 낙화암의 슬픔을 간직한 근본원인을 술로 파악했다. 고려의 정치가 문란해진 것도 술을 주원인으로 분석했다.

임금은 개인적 취향과 정치적 신념으로 사실상 금주를 실천한 것이다. 술의 약용도 그리 내켜하지 않은 것이다. 세종에게 술의 용도는 기호품이 아닌 외교와 제사의 의례용에 가까웠다.

세종은 풍질(風疾) 가족력이 있다. 할아버지 태조. 큰아버지 정종에게 풍질이 있었다. 신하들이 세종에게 약주를 청한 것은 단순한 찬 몸을 보호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단순히 근심걱정을 잊는 게 아닌 약의 효과를 촉진하는 용도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오는 술의 약효는 풍한사기(風寒邪氣)를 없애고 혈맥(血脈)을 통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술과 한약재의 조합은 풍한으로 인한 관절통증에도 많이 쓰인다. 요즘에는 제약으로도 개발된다.

일례로 한의사 배원식(裵元植)이 창방한 활맥모과주(活脈木瓜酒)가 있다. 근골격계에 유효한 한약재를 술로 추출할 때 가장 약효가 높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이 처방은 관절염치료제로 제약화 됐고, 2015년에 170억 원의 총매출을 기록했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다. 창덕궁 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최주리 한의사  subhut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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