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과 왕실의학] <1> 왕자의 출산과 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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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과 왕실의학] <1> 왕자의 출산과 한약
  • 최주리 한의사
  • 승인 2018.01.1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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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은 세종 즉위 600주년이다. 세종시대의 왕실의학을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최주리 이사장이 살갑게 풀어쓴다. 세종 시대의 역사와 왕실문화는 이상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문화위원이 자문했다. <편집자 주> 

세종대왕의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다. 태종대왕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태조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셨다. <세종실록 1권 총서>

한의사 최주리

세종대왕은 1392년 5월 15일(음력 4월 10일) 태어났다. 왕이 되기 전의 집인 잠저는 준수방이다.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준수방은 한성부 북부 12방 중 하나로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과 옥인동 일대다. 세종이 태어날 때의 신분은 종친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손자다. 왕자의 자녀 출산은 왕실의 경사였으나 국가적 관심사항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종의 탄생은 여느 왕족의 태어남 보다 조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세종의 아버지인 정안군(태종)이 권력다툼에서 밀려 가택연금 상태였기 때문이다. 세종 1년 2월에 상왕인 태종이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주상(세종)이 태어났을 때 나는 정도전 무리에게 밀려 할 일이 없었다. 죽임을 당할 염려로 울적해 있었다."

세종대왕은 1392년 5월 15일(음력 4월 10일) 태어났다. 왕이 되기 전의 집인 잠저는 준수방이다.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준수방은 한성부 북부 12방 중 하나로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과 옥인동 일대다. 세종이 태어날 때의 신분은 종친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손자다. 

왕자의 자녀 출산은 왕실의 경사였으나 국가적 관심 사항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종의 탄생은 여느 왕족의 태어남 보다 조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생과 사의 살얼음판을 걷는 정안군의 집에 축하객이 구름처럼 몰릴 리는 만무했다. 정안군의 가신과 친지만의 조촐한 모임으로 새 생명을 축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궁궐에서 출산할 수 있는 여인은 왕비와 후궁이다. 또 성은을 입었으나 아직 후궁의 첩지를 받지 못한 여인이다. 세자의 여인도 궐내에서 출산한다. 그런데 왕비와 세자빈 외 여인의 대궐내 출산은 시기마다 달랐다. 후궁이 공식적으로 대궐에서 아이를 낳는 길은  선조 때 열렸다. 그 이전에는 출산을 하려면 사가로 나가야 했다. 하지만 조선건국 직후에는 후궁이 궁궐에서 출산한 사례도 있다. 건국 직후에는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탓이다.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는 여섯 왕자를 낳았다. 이중에 2남인 익현군은 경복궁에서 출생한 게 확인된다. 세종의 또 다른 후궁인 혜빈 양씨가 낳은 3왕자 중 둘째 수춘군도 대궐에서 태어났다. 왕실 법도에 의하면 궁에서 태어날 수 있는 아이는 왕과 세자의 핏줄뿐이다. 세자의 자녀를 제외한 왕의 손자는 궁궐에서 태어날 수 없다. 세종의 아버지인 정안군은 세자가 아닌 왕자 신분이다. 따라서 왕의 손자인  세종의 사가 출생은 당연했다.
 
왕족의 출산 때 왕실에서는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왕실에서의 공식적인 배려는 없다. 예외적으로 임금이 아끼는 종친에게 내의원과 의녀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정권에서 소외된 정안군에게 특전은 없었다. 따라서 세종은 여느 사대부가와 마찬가지로 민간 의녀나 산파의 도움으로 세상에 첫 울음을 터뜨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 왕실은 많은 왕자를 필요로 했다. 왕자는 신생국 조선을 안정시키는 든든한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야망과 포부가 큰 정안군은 딸 보다 아들을 더 원했을 수밖에 없다. 당시에 아들 낳는 법은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으로 설명된다. 동의보감에는 “시태(始胎)는 임신 3개월로 남녀의 성이 구분되지 않는다. 약을 쓰면 여아가 남아가 바뀔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조선 초부터 의과(醫科) 시험과목으로 채택된 부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에도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임신부의 허리 왼쪽에 석웅황(石雄黃) 1냥을 비단 주머니에 넣어 두른다. 임신부의 왼쪽 팔에는 활줄 한 개를 넣은 비단 주머니를 찬다. 또는 활줄을 3개월 동안 허리에 두른다. 원추리 꽃을 차도 효과가 있다. 임신부의 자리에 몰래 수탉의 긴 꼬리털 3개를 숨겨 놓는다.”
  
하지만 이는 의학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서에 소개된 것은 당시 남아선호사상과 도교사상이 맞물린 결과일 뿐이다. 건강한 자녀, 특히 아들을 희망하는 간절한 바람이 의서에 깃든 것이다. 
  
현실적으로 왕실이나 민간이나 출산 후 가장 신경 쓴 것은 산후 음식이다. 산모가 잘 먹어야 신생아가 건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산 후에는 산모의 어혈제거, 면역력 증진에 주안점을 둔 처방을 했다. 또한 산후 뿐만 아니라 임신 중에도 한약을 복용했다. 태아가 건강하게 자라고, 임신부가 입덧을 적게 하고, 출산 때 자궁이 쉽게 열리게 하려는 목적이다.  임신 중에 사용되는 약재는 당귀, 백출, 황금, 진피 등이다. 다만 인삼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는다.
  
출산 후에는 풍(風), 냉(冷), 한(寒), 습(濕)에 취약하다. 약해진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면 자궁내막증, 근육통, 관절통, 오한, 우울증, 부종 등의 우려가 있다. 산후 보약은 체내의 불순물인 노폐물과 독소 등을 제거하고 장부의 균형과 혈액순환 촉진을 위해 천궁, 당귀, 백출, 백작약, 대복피, 자감초 등의 약재를 주로 처방한다.

<글쓴이 최주리>
왕실의 전통의학과 사상의학을 연구하는 한의사다. 창덕궁 한의원 원장으로 한국한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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